“변화에 대한 대응은 우리 경영자들에겐 영원한 숙제입니다.”

김승유 회장이 41년 동안 온몸으로 일궈낸 하나금융을 떠나면서 후임자인 김정태 회장에게 당부한 말이다. 30년 동안 사무실 책상 뒤에 걸어놓았던 알프레드 슬론의 영어 경구 액자에 자신의 경영철학을 직접 적어 퇴임식 날(3월23일) 전달했다. 슬론은 1920년대 포드의 자동차 독점 체제를 무너뜨린 제너럴모터스(GM) 최고경영자로, 경구를 통해 변화에 대한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후임 김 회장은 이 액자를 자신의 책상 뒤에 걸어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임자의 뜻을 되새기고 있다고 한다. 전임자의 뜻을 숙지한 덕분인지 김 회장의 발걸음은 가뿐했다. 취임식 다음 날 만난 김 회장에게 막중한 책임을 맡은 소감을 물었다. “전임자가 다 해놔서(그림을 다 그려놔서) 그대로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출입기자들과 만나서는 “마무리 투수 역할을 하겠다”며 스스로를 낮췄다.

'레거시' 만드는 게 경영능력

김승유 전 회장은 단자(短資)사인 한국투자금융(하나은행 전신) 시절 1987년 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런 전임자의 혜안을 바탕으로 정해진 방향에 따라 하나금융을 이끌어 가겠다는 게 김정태 회장의 ‘팔로어 리더십’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금융경영인의 퇴진이 주목을 끈 것은 스스로 박수 받으며 떠난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탁월했던 경영 수완이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했다.

위대한 기업은 경영자가 떠나도 후임자에 의해 더 빛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작년 여름 뉴욕에서 만난 존 김 뉴욕라이프자산운용 최고경영자와 성취 동기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국계 중 월가 최고위직에 오른 그는 “경영자로 재직할 때의 실적도 중요하지만, 떠나고 나서도 돋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임자에게 넘겨줄 ‘레거시(legacy)’를 만들어 가는 게 경영자의 진짜 능력이란 것이다.

애플이 그런 기업이다. 미국 언론은 수술을 받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 애플이 금세 어떻게 될 것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그의 사후에도 애플의 신화는 이어지고 있다. 애플 주가는 작년 10월 잡스 사망 이후 60%가량 올랐다.

길 닦기 위해선 손 더럽혀야

후임자인 팀 쿡이 최근 배당을 결정하자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잡스의 흔적 지우기’라고 꼬집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쿡은 임직원의 창의성이 발현돼 잡스의 혁신엔진이 계속 돌도록 하는 데 경영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타벅스 설립자인 하워드 슐츠는 자서전 ‘온워드(Onward)’에서 기업이나 조직에도 ‘기억(memory)’이 있다고 말했다. 그 기억이 기업의 문화이자 임직원들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강조한다. 기업의 가치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경영에 획기적인 묘책은 없다.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길을 닦기 위해 손을 더럽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독특한 기업 문화와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많은 기업인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일수록 기업 이미지가 급속히 개선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편법을 동원해 돈벌이에 급급한다는 비판을 잠재울 수 없다. 경영자가 후임자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선진 기업으로 가는 지름길 가운데 하나다.

이익원 금융부장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