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아닌 민주적 승계 통해 능력 검증된 후계자 세워라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코리아 갓 탤런트, 기적의 오디션, 탑 밴드…. 우리나라 TV에서 방영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오디션 열풍은 이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이웃나라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4억명의 고정 시청 팬을 확보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얼마 전 중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 ‘차오지뉘성(超級女聲)’이 폐지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2004년 첫 방송 뒤 선정적이라는 평가도 함께 받아왔던 이 프로그램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2시간으로 제한한다’는 방송규정을 어긴 이유로 중단됐다. 청소년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방송규정 위반이지만, 속사정은 복잡하다. ‘나는 가수다’처럼 현장 평가단이 투표로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 중국 정서와 맞지 않다는 것이 핵심적인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방송 프로그램치고 민주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해 중국의 지도층이 못마땅히 여겼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개방됐다고는 하나 중국의 운영방식은 여전히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꼭 중국 사례가 아니더라도 조직 운영자가 의사결정권을 일반 조직원에게 넘기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도 정치에서는 투표에 의한 리더 선발이 보편적이지만, 비즈니스에서는 여전히 리더 선발에 폐쇄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CEO를 직원 대표의 손으로 뽑는 민주적인 회사가 있다. 아웃도어 제품에 꼭 들어가는 특수섬유 고어텍스를 만드는 고어. 이 회사는 2005년에 직원 대표와 간부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투표를 통해 현재의 CEO인 테리 켈리를 선발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창업주인 빌 고어의 믿음에 기원한다. 회사는 주주의 것이 아니라 직원의 소유라고 믿었던 빌 고어는 자신이 물러나는 시점에 회사의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CEO 선발도 맡겼다. 이미 신입 직원의 선발과 배치, 평가를 직접 해왔던 직원들은 이 제안을 수용, 설문을 통해 그들의 CEO를 선발했다. 수년간 회사 운영에 참여했던 직원들이 만든 성숙한 조직문화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많은 기업들이 CEO 승계 과정을 투명하게 운영할 때 가장 뛰어난 리더를 발굴할 수 있다. 최근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물러나면서 팀 쿡을 차기 CEO로 임명하자 조직 내외부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팀 쿡에게 수년간 CEO 대행 등의 역할을 맡겨 검증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이 사장직을 물려줄 때 3명의 임원을 후보로 정하고 사내에 공지했다. 일정 기간 3명의 업무수행 능력을 검증하고 가장 뛰어난 후보를 CEO로 세운다는 계획에 업계 인사들은 놀라움의 눈길을 보냈다.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세습 아닌 민주적 승계 통해 능력 검증된 후계자 세워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5현제(賢帝) 시대’가 인류 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찬양했다. 현명한 황제가 다섯이나 잇따라 나온 가장 큰 요인은 그들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황제들은 경쟁을 거친 지도자나 덕망 높은 철학자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겼다. ‘5현제 시대’가 마르쿠스로 끝나게 된 것은 그에게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번에 따르면 아들 콤모두스가 학문을 멀리한 폭군으로 살다가 암살되면서부터 로마제국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주식회사라도 창업주의 자녀에게 회사를 세습하는 것이 일반화된 한국 사회는 기번의 통찰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는 승계할 수 있어도, 경영 능력까지 승계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꿈꾸는 우리 기업인들은 시청자 투표를 문제삼아 방송을 중단시키는 중국 지도자층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

김용성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yskim@ig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