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금융정책은 대개 구호부터 요란한 게 많다. 리딩뱅크 · 메가뱅크에다 동북아 금융허브 · 금융중심지를 외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물론 결과는 참담하다. 정부가 출범시킨 리딩뱅크는 10년이 되도록 이자장사에 급급할 뿐,은행산업을 선도했다는 그 어떤 성과도 찾을 길이 없다. 동북아 금융중심지에는 글로벌 금융회사의 지역 네크워크 유치 실적이 제로다. 의욕과잉과 방향착오적 헛구호가 빚어낸 결과들이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해 글로벌 투자은행(IB)들에 맞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육성하고,자본시장 빅뱅을 유도하겠다고 나섰다. 국내 기업의 대형 해외 프로젝트를 지원할 자본시장의 키플레이어를 만들고 은행과의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그동안 IB다운 IB가 등장하지 못한 것이 법 미비와 규제 탓만으로는 보지 않는다. 진짜 이유는 해외에만 나가면 깨지고,키코 CDO 옵션쇼크 등 외국 금융사들의 농단에 속수무책 당하는 실력 부족에 있다. IB의 본질인 리스크를 파악하고 관리할 능력이 떨어진 탓이다.

IB는 자본시장법을 고친다고 갑자기 등장하는 게 아니다. IB의 법적 명칭은 '종합금융투자사업자'로,과거 종합금융사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이미 30여개 증권사가 IB사업부를 두고 있고,IB시장은 수수료 덤핑 등 레드오션이 돼가는 판이다. 금융위가 IB의 자기자본 커트라인을 3조원으로 정한 것도 무슨 근거가 있어 정한 것이 아니다. 국내 5개 대형 증권사의 자기자본이 평균 2조7000억원이니 10%가량 증자하면 된다는 현실적인 논리일 뿐이다. 그래봐야 골드만삭스의 30분의 1,노무라금융투자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꿈꾸는 것은 엄정한 현실의 토대 위에서 창의와 혁신을 꾀하는 민간의 몫이지,정부가 미리 장담할 것은 아니다. 금융정책이 구호만 요란해진 것은 정부가 금융을 설계할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금융당국이 파워풀한 IB와 자본시장 빅뱅까지 설계하겠다고 달려든다면 이는 의욕과잉에 불과하다. 당국은 시장의 규율과 불필요한 규제만 구분할 줄 알아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