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또 심판받은 '실용주의'

"기업인이 권력에 대해 부담없는 세상이 됐다. "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었던 2007년 12월28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에 모인 20여명의 대기업 총수들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며 반겼다. 이 대통령은 두 달 뒤 취임식에서 "기업이 국부(國富)의 원천이요,일자리 창출의 주역"이라는 '기업 국부론'까지 제시했다. MB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는 이렇게 출범했다.

정권 초기 목포 대불산업단지 내 입주업체들의 민원 대상이었던 '전봇대 뽑기'는 MB식 규제 철폐의 상징이었다. 이후 비즈니스에 관련된 각종 인 · 허가 절차와 수도권 규제 등에 걸쳐 일련의 규제 완화 정책이 이어졌다. 정치인과 관료의 전유물이었던 공항 귀빈실을 기업인에게 개방하고,두바이 국왕의 일화를 들어가며 "애로가 있으면 언제든 직접 전화하라"고도 했다.

3년여가 지난 지금,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통령이 '기름값이 묘하다'고 운을 떼자 주무 장관은 기름값 인하 논리를 찾고,논리 발굴에 실패하자 "성의표시로라도 값을 내리라"며 정유업계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화난 얼굴로 바뀌었다. 경제학자 출신 측근들은 '초과이익공유제'라는 억지 논리로 대기업들을 곤혹스럽게 하고,삼성 포스코 등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인정받은 기업들의 실명을 들먹이며 "국민연금을 동원해서라도 경영을 지도해야 한다"며 을러대고 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초심이 표변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기업들의 투자나 일자리 창출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고환율 정책의 최대 수혜자인 대기업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악화되고 있는 데서 나오는 정치적 부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대기업들에 대해 '섭섭해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건 그 방증이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8월 광복절 축사에서 '공정사회' 아젠다를 제기한 이후 기업들에 각종 견제구를 던져왔고,갈수록 그 강도(强度)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대기업 이슈에 관한 한 이 대통령이 틈만 나면 강조해 온 '소통'을 위한 노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와 고용에 대한 정부와 재계의 시각차가 단적인 대목이다. 30대 그룹의 투자액은 2009년 72조원에서 지난해 100조원을 넘었고,올해는 사상 최대인 113조원으로 늘려잡았다.

고용도 2009년 7만5000명에서 지난해 10만7000명,올해는 12만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소니 노키아 등 전통의 글로벌 대기업들이 시장 트렌드 대응에 실패해 추락하는 와중에도 한국의 대기업들은 체질을 강화,실적에 목마른 투자자들을 증권시장으로 대거 끌어들이며 주가의 사상 최고치 행진을 이끌고 있다. 이런 엄연한 현실에 눈을 감고 대기업들을 '시장의 적(敵)'인 듯 몰아붙이는 것은 내년 선거철을 앞둔 '표(票)퓰리즘' 때문이 아니냐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MB 정부와 한나라당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거둬들이고 '실용'과 '친(親)서민'을 대신 꺼내들며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하려 했지만,결과는 지난해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4 · 27 재 · 보선에서도 참패로 귀결됐다. 원칙과 철학이 부재한 실용주의는 정치적 기회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연이은 선거 패배에서 얻어야 할 진정한 교훈이 아닐까.

윤성민 산업부 차장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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