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글로벌 금융위기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삼성증권에 회사 매각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왔다.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전자 등 제조사들에 비해 약한 금융부문의 글로벌 경쟁력을 단번에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금융시장에서는 '삼성이 리먼을 인수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의 결정은 달랐다. 그는 리먼을 인수하지 않기로 했다. 박 사장은 "리먼 인수대금이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었지만,우리(삼성)가 리먼 정도 되는 글로벌 투자은행(IB)을 경영할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설명했다.

대신 밑바닥부터 실력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덩치'를 키우기에 앞서 단단한 '근육'부터 만드는 전략이었다.

출발점은 홍콩시장 공략이었다. 삼성증권은 2009년 8월 홍콩 금융중심가의 스리 익스체인지 스퀘어(Three Exchange Square)빌딩에 삼성증권 아시아본부를 출범시켰다. '2020년 글로벌 톱10' 증권사를 향한 도전의 시작이었다.

◆성공적인 홍콩시장 독자공략

삼성증권은 인력 채용,1억달러 증자 등 관련 업무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홍콩의 삼성증권 아시아본부가 벌이는 사업은 △기업공개(IPO) 블록딜 등 자본시장(ECM) 업무 및 인수 · 합병(M&A)을 포함한 기업금융 △현지 기관대상 주식중개 △직접운용(Trading) △자기자본 투자(PI) 등 4개다.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IB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분야들이다. 하지만 삼성증권은 아시아본부 출범 2년이 안된 현 시점에서 벌써부터 의미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2009년 9월 홍콩 증시 최대 규모였던 중국야금과공집단(MCC) IPO에 인수단으로 참여했고,11월에는 중국 와인업체 톤틴(Tontine)의 IPO에 공동 주관사로 참여했다. 삼성증권이 이처럼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인재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꼽힌다. 45명으로 출발한 아시아본부의 인원은 110명으로 불어났다. 삼성이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수혈한 외부인사 가운데는 황성준 전 크레디트스위스(CS) 아시아태평양 주식부문 공동대표,위 리앳 리(Wee Liat Lee) 전 노무라 인터내셔널 부동산부문 대표 등 40여명이 포함돼 있다.

삼성증권은 홍콩 아시아본부에서 습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2015년에 아시아 톱5 증권사,2020년에 글로벌 톱10 증권사가 된다는 목표를 세워놨다. 그 기반은 어느 정도 다졌다는 게 자체 평가다. 글로벌 IB 경영에 대한 두려움도 벗어났다. 박 사장은 "홍콩법인의 인력 수준과 인프라가 현지 경쟁사들과 겨뤄볼 만한 수준이 됐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국내에선 자산관리 역량 강화

삼성증권이 지난해부터 국내 자본시장에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부문은 자산관리 분야다. 전통적인 브로커리지(주식중개) 영업에서 벗어나 자문형 랩 어카운트(자문형 랩),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액자산가들의 '입맛'에 맞는 금융투자상품 판매를 통해 자산관리 전문 금융회사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다.

글로벌 IB역량 강화도 자산관리 부문의 경쟁력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IB부문을 통해 개발된 각종 상품들이 자산관리 부문을 통해 고액자산가들에게 팔려나가기 때문에 증권사 입장에서 IB와 자산관리 부문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설명했다.

삼성증권은 영국의 대안투자 전문회사인 맨인베스트먼트,미국의 레그메이슨,중국 화샤기금 등 글로벌 유명 자산운용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고액자산가들을 타깃으로 한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금융자산 30억원 이상의 초고액자산가들만 이용할 수 있는 SNI(Special Noble and Intelligent) 점포도 확충하고 있다. 서울파이낸스센터와 강남파이낸스센터,호텔신라,인터컨티넨탈호텔 4곳의 SNI센터를 통해서만 5조원의 자산을 굴리고 있다.

삼성증권이 자산관리 부문 경쟁력강화 차원에서 요즘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고객만족'이다. 펀드와 자문형 랩 등 주요 금융투자상품에 가입한 사람이 5영업일 이내에 구매철회 의사를 밝힐 경우,선취판매 수수료 가운데 상당액을 돌려주는 서비스를 최근 시작했다. 펀드 가입기간이 긴 고객들에게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서비스도 시행에 들어갔다.

◆증권주 '톱픽'선정 잇따라

삼성증권은 최근 발표한 2010회계연도(2010년 4월~2011년 3월) 실적에서 영업이익이 3563억원으로 한 해 전보다 1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리 상승에 따른 채권운용 손실로 주요 증권회사들의 영업이익이 대부분 줄어든 가운데 영업이익이 증가한 곳은 삼성증권이 유일하다.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브로커리지 영업에서 벗어나 자산관리 영업에 역량을 집중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향후 성장성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좋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증권주 가운데 삼성증권을 톱픽(최선호주)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채민경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자문형 랩과 주가연계증권(ELS) 판매 호조로 양호한 실적이 지속될 것"이라며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11만4000원을 유지했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