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업구조의 고질적인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문제는 1960년대 경제개발 초기의 발전전략에서 비롯됐다. 자본 · 기술 · 시장 어느 것도 갖지 못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에 올인하면서 모든 자원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다. 대기업들은 갈수록 비대해졌고 대다수 중소기업이 거기에 종속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은 그 결과다.

대기업이 막강한 시장지배력과 원청(原請) 권력을 무기로 중소기업의 생존을 좌우하게 되면서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화됐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해야 했고,대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했다. 다 그렇지는 않아도 내부에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고 협력업체에 어음을 주거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심지어 중소기업이 힘들여 개발한 기술을 빼앗는 대기업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관계에서 중소기업들이 자생력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50년 동안 쌓인 폐단이다. 역대 정부가 중소기업 문제 해결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고 온갖 대책과 지원을 쏟아내면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잘 완비된 중소기업 육성제도를 갖췄는데도 여전히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이제 소수의 대기업에 기댄 성장모델은 한계에 부딪쳤다. 중소기업의 위기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앞으로도 자립기반을 굳히지 못해 경쟁력이 자꾸 떨어진다면,결국 대기업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공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 또한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굳이 대통령이나 정부가 나서 대 · 중소기업 상생을 다그치지 않아도 대기업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중소기업을 도와야 할 당위성이다. 하지만 모든 정책적 지원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취약한 자금 기술 인력 상품 경영역량 등 구조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채 돈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데서 보듯,돕는 방식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중소기업 집중 지원은 또다른 국가자원 배분의 왜곡,자생기반의 약화를 가져와 오히려 중소기업을 더 나쁜 상황으로 몰아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중소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높여 대기업과의 수평적 거래가 가능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물론 어렵다. 그렇더라도 중소기업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손잡고 뭉친다면 가능한 일이다. 비슷한 기술로 같은 제품을 만드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극소수의 대기업만을 바라보고 납품경쟁을 벌일 게 아니라,서로 힘을 합쳐 좁고 폐쇄적인 사업영역에 갇힌 한계를 벗어나라는 얘기다. 그런 관점에서 요즘 IT 중소기업들이 밀집한 구로디지털밸리 등에서 새로운 협업 모델로 자리잡고 있는 '품앗이 경영'을 주목할 만하다. 여러 중소기업이 각자의 강점 기술과 역량을 결합하거나 역할분담을 통해 사업과 제품 경쟁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다. 자금을 분담하고 정보와 기술,상품개발,마케팅 등을 공유하거나,특화된 연구개발,생산,시장개척의 역할을 나눠 수행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들고 대기업과의 협상력을 키우는 협력이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중소기업끼리의 상생이자 자발적인 클러스터 구축인 셈이다. 중소기업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투자부담과 위험은 분산시키고,부족한 경영자원을 서로 보완하면서 이익은 공유한다. 협력 가능한 분야는 무궁무진하고,이런 협력을 통해 중소기업들도 대기업 못지않은 생산성 · 원가 · 기술의 혁신을 달성함으로써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시혜(施惠)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 스스로 대기업에 맞설 힘을 키움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점을 전제한다면,정책 또한 마땅히 그것을 촉진하고 돕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추창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