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최신규 손오공회장‥팽이 하나로 1천억 매출 '장난감 대통령'으로
열세 살 소년의 손에 들린 건 연필과 공책이 아닌 망치와 정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소년은 '고사리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매일 10시간 넘게 금을 다듬었다. "자정까지 일하면 야식으로 자장면을 주겠다"는 사장의 유혹에 '타이밍'이란 각성제를 먹어가며 밤을 지새운 날도 수없이 많았다.

'영등포 꼬마 금 세공사.' 최신규 손오공 회장(54)의 40여년 전 별명은 이랬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던 최 회장은 남들보다 10년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작업 현장이 교실이었고,직장 선배와 거래처 사람들이 선생님이었다.

'못 배운 한(恨)'은 최 회장에게 "배운 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두 배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와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선생님"이란 생각을 심어줬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연매출 600억원 규모의 국내 최대 플라스틱 완구업체인 손오공을 일궈냈다.

◆가난,그리고 무학(無學)


최 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소쿠리 행상을 했다. 소쿠리를 머리에 인 채 어린 아들 손을 붙잡고 서울 문래동과 경기도 광주를 오갔다. 최 회장은 "길을 걷다 배가 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러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농부들이 새참 먹는 자리에 끼기도 했다"며 "이도저도 어려울 때는 길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아카시아 꽃으로 허기를 달랬다"고 회상했다.

궁핍한 생활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계속됐다. 하지만 최 회장의 학력이 '초등학교 3학년 중퇴'로 끝난 것은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근 영등포로 이사하면서 새로 옮기기로 한 학교에 전학 서류를 제때 내지 않은 탓이었다. 최 회장은 "어머니가 행상 나가고 친구들이 등교하고 나면 홀로 돌멩이를 장난감 삼아 놀곤했다"며 "장난감 기차가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나중에 장난감 회사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도둑 누명'에 그만둔 첫 직장


어머니가 최 회장의 손을 붙들고 영등포의 한 금은방으로 데리고 간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밥벌이라도 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금 세공사로 취직시킨 것.다행히 최 회장은 손재주가 좋았다. 그리고 성실했다. 사장은 그런 그를 예뻐했다. "언젠가 금은방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금 세공사 생활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금을 세공하면서 남는 부스러기가 매일 조금씩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는데 '가장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한다'는 이유로 그가 범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사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훗날 당시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사장의 조카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믿었던 사장에 대한 배신감에 최 회장은 그 길로 금은방을 그만뒀다.

최 회장은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대가가 도둑 누명이냐'란 생각에 영등포 뒷골목을 배회하며 '될대로 돼라'는 심정으로 살았다"며 "그렇게 2년을 보냈더니 어느날 갑자기 3류 인생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정신을 차렸다"고 말했다.

두 번째 직장은 수도꼭지를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다. 기술을 완벽하게 익힐 즈음 셋째 형과 함께 수도꼭지 제조업체인 협성공업사를 세웠다. 1974년,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집념과 열정의 결실 '끈끈이'


1985년 어느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최 회장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장난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장난감 자동판매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 전화였던 것.당시 최 회장은 셋째 형으로부터 독립해 녹즙기 부품을 생산했지만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 헤매던 그에게 10여년 만에 듣는 '장난감' 한마디는 그간의 고민을 풀어주는 해답이 됐다.

최 회장의 눈에 들어온 장난감은 '끈끈이'였다. 유리창에 던지면 딱 달라붙은 뒤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오는 이 제품은 당시 꽤나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약 성분이 포함된 탓에 유독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유리창과 손에 끈끈이 성분이 묻는 결함도 있었다.

이런 문제만 해결하면 '대박'을 칠 수 있다는 확신이 최 회장에게는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방 한 칸짜리 월세방에 신혼집을 차릴 정도로 쪼들렸으니 돈 안들이고 개발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월세방의 연탄 아궁이가 실험실이 됐고,아내의 결혼반지까지 팔아 연구자금을 마련했다. 3개월 뒤에는 월세 낼 돈도 부족해 여관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최 회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뒤로하고 끈끈이 개발에만 매달렸다. 결국 최 회장은 1년 만에 손에 묻지 않으면서도 독성이 없는 끈끈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끈끈이는 1000만개 이상 팔리며 그에게 40억원의 수익을 안겨다줬다.

◆완구업계를 평정하다


최 회장의 다음 타깃은 장난감 시장의 주인공인 로봇이었다. 로봇 완구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이었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 최 회장의 지론.1992년 손오공을 설립한 뒤 곧바로 일본 2위 완구업체인 다카라를 찾아가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기술 제휴를 맺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국내 최초 합체 변신 로봇 '다간'을 비롯해 '라젠카' 'K캅스' 등은 연달아 히트작 대열에 올랐다.

잇따른 성공으로 손오공의 위상이 한껏 올라간 1999년,최 회장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아이템인 '팽이'를 꺼내든다. 어린 시절 최고의 놀이였던 팽이를 현대식으로 재단장하면 상당한 인기를 끌 것으로 판단한 것.팽이를 줄로 감아 던지는 대신 발사대를 이용해 돌리는 방식도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팽이 붐'을 조성하기 위해 TV 애니메이션 제작도 주도했다.

주변에선 "PC게임이 대세인데 누가 팽이를 찾겠느냐"며 말렸지만,그는 밀어붙였다. 결국 '탑블레이드'로 이름 붙여진 신개념 팽이는 2001년 출시 후 3년 동안 무려 1700만개나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관련 매출만 1000억원에 달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최 회장이 국내 완구시장을 평정하는 순간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최 회장은 2005년 좋아하던 골프를 끊었다. 본인 스스로 '성공의 상징'으로 여겼던 큼지막한 집도 팔고 전셋집으로 옮겼다. "끈끈이를 개발할 때의 '헝그리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유는 이랬다. 최 회장은 2002년 온라인 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연전연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간단했다. 잇따른 성공에 도취돼 있었다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특성도 모르는 CEO가 진두지휘하다 보니 곳곳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것이 최 회장의 진단이었다.

온라인 게임은커녕 PC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최 회장은 그 길로 온라인 게임에 '올인'했다. 5년이 지난 올해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3편의 게임이 속속 시장에 나온다. 100억원 이상 투입된 '베르카닉스'를 비롯해 '클럽 스타킹'과 '머큐리'가 주인공이다. 완구와 게임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의 다음 목표는 뭘까.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기억하세요? 제페토가 인생의 최대 걸작인 피노키오를 만든 건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된 뒤였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요. 머리가 굳어 더 이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아 연구할 겁니다. 제 인생의 최대 걸작은 한참 뒤에 나올 테니까요. "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