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의 레이저가공기 생산업체 한광의 계명재 사장(53)은 요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다. 20년 전인 1990년 5월 갓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기름 냄새 나는 기계업체를 창업한 일을 자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그를 취재했을 때 "남들이 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싶어 창업을 결심했다"고 들려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20년은 여느 중소기업 사장이 걸어왔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물과 도전의 역사였다. 외환위기가 급습한 1998년과 미국발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몰아친 지난해엔 매출이 반으로 쪼그라드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이를 기회로 삼았다. 외환위기 때는 휴지조각이 된 매출채권을 죽은 자식처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지속성장은 허명이 된다는 걸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해외진출로 국내외 사업포트폴리오를 정비한 뒤 2000년엔 코스닥 시장에 상장시켜 직접금융의 물꼬를 텄다. 지난해 키코라는 괴물로 56억원의 손실을 입었을 때는 '리스크 매니지먼트'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게 됐다.

한광이 생산하는 레이저가공기는 대기업이나 임가공업체에 공급돼 각종 절단 작업에 쓰인다. 한광으로부터 대당 3억~10억원 하는 레이저가공기를 사들여 임가공업체를 꾸려가는 소사장들도 전국에 500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독일 트럼프사 등이 과점하던 레이저가공기 시장에선 이미 '히든챔피언'이다. 내수시장에선 50% 가까운 점유율을,글로벌 히든 챔피언과 벌이는 세계 시장에선 '톱10'에 안착 중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평균 수명은 10.6년, 20년 이상 장수하는 기업은 12.6%에 불과하다는 점에 비춰볼 때 한광의 성취는 박수받을 만하다. 그러나 20년을 레이저가공기 분야에서 한우물을 파온 한광은 종업원 100명에 올해 매출 500억원을 목표로 하는 전형적인 중소기업의 모습이다.

정부는 얼마 전 '세계적 전문 중견기업 육성 전략'을 내놨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서 산업의 허리 역할을 해줄 '미드필더' 300개사를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그렇지만 미드필더 육성이 지나치게 규모에 치중한 모양새다. 산업의 성격에 맞는 '맞춤 육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성장일변도 정책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세계 일류는 규모로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간판 밑에 몰려 있는 기업들이 많지만 이제부턴 콘텐츠별로 새롭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 가운데는 △웅진그룹처럼 서비스 기반으로 도약한 '서비스기업군'과 △대기업과의 상생으로 큰 '납품기업군' △부품과 소재로 '히든 챔피언'을 꿈꾸는 '기술 기반 기업군'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분류 속에 시장환경을 들여다봐야 '선택과 집중'의 지원 대책도 나온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20년 전 취재수첩과 명함첩을 뒤적이면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도 사업을 영위하는 중소기업이 수첩에 적힌 전체 기업의 10% 남짓이라는 점이다. 한광은 다음 달 30일 창업 20주년을 맞는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더군요. " 20년 동안 앞만 내다보고 달려온 계 사장이 얻은 교훈이다. 새겨들을 만하다.

남궁 덕 과학벤처중기부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