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저는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받는 날,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정말 미안합니다. "

2008년 4월22일,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 퇴진을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재계에서는 그의 퇴진을 특검 수사와 정치적 공세를 극복하고 삼성을 되살리기 위한 승부수라고 해석했다.

1987년 총수 취임 이후 삼성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정면으로 돌파했던 이 회장이 '미래의 삼성을 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카드를 뽑았다는 의미에서다.

24일 이 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에 대한 해석도 퇴진 때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승부수를 띄웠다는 평가다. 당초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복귀하더라도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명예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 왔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공식 직급에 '명예'라는 꼬리표가 없었다. "역시 이건희"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이다.

◆충격요법으로 '신경영' 전파

이 회장은 삼성이 고비에 처했을 때마다 승부사로 변신했다. 그의 무기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충격요법'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를 철저하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으로 널리 알려진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앞두고 소니,마쓰시타,필립스,지멘스 등 세계 일류기업들의 제품과 삼성 제품을 같이 진열하는 '비교 전시회'를 열었다.

이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삼성 제품들을 일일이 망치로 내려치면서 "모든 제품들을 새로 만들라"고 사장들에게 호통쳤다. "VTR 부품 수가 너무 많다" "브라운관의 독창성이 부족하다" "리모컨 조작이 불편하다" 등의 질타가 이어졌다.

'국내 최고'라는 허명(虛名)에 안주하고 있던 임직원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이 회장이 전시회를 연 목적이었다. 신경영 발표 한 달 뒤에 도입한 '7 · 4제(오전 7시 출근-오후 4시 퇴근)'는 그 연장선상이었다. 출 · 퇴근 시간을 한꺼번에 2시간이나 앞당겨 조정한 이 조치는 "변해야 산다"는 절박감을 불어넣기 위한 비상 수단이었다.

이 회장을 승부사로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과감하고 빠른 의사결정 때문이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모두가 반대하는 사안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게 이 회장 특유의 경영 스타일이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도 이런 고집스러운 선택에서 시작됐다. 반도체 사업 초기였던 1988년 이 회장은 셀(cell)을 기판 위로 쌓는 스택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도시바 NEC 등 선발업체 대부분이 아래로 쌓는 트렌치 방식을 도입한 것과 정반대였다.

결과는 이 회장의 승리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 업체들이 불황을 우려해 설비투자를 축소할 때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스택 방식을 도입한 뒤 D램 세계 1위에 오르기까지 걸린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잘 나갈 때마다 위기의식 강조

이 회장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삼성 임직원들을 독려해왔다. 2002년 4월은 삼성 사사(社史)에서 '잔치의 달'로 기록돼 있다.

삼성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 소니의 시가총액을 앞지르고 분기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어서는 등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흥겨웠던 분위기는 이 회장이 주재한 회의 한 번으로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 회장은 그 해 4월19일 계열사 사장들을 삼성인력개발원에 모아 놓고 "5년,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고 말했다. "항공기가 마하의 속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전체 소재를 바꿔야 하듯이,이제 전체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선발에 차이고 후발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뒤따랐다.

반도체 경기가 최고조에 올라 영업이익이 20조원을 넘었던 2004년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그 해 삼성 내부에서 가장 강조한 단어는 '위기의식'이었다. 이 회장은 "모든 것이 가장 잘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란 말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새로운 버전 '창조 경영' 시작된다

이 회장의 2006년 작품인 '창조 경영'도 그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새로운 비전과 충격요법,빠른 실행 등 이전에 보여줬던 행보가 다시 한번 되풀이됐다.

창조 경영의 시작은 이 회장이 미국 뉴욕에서 열린 '밴플리트 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9월14일이다. 오랜 해외 체류 끝에 귀국한 지 7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출장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출장 일정은 40일에 달했으며 출장지도 뉴욕 런던 두바이 요코하마 등 세계 각지였다.

뉴욕에서는 전자계열 사장들에게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할 창의적 제품을 내놓을 것을 주문했고,런던에서는 첼시 구단을 본받으라고 지적했다.

두바이에서는 셰이크 모하메드 총리의 창의적인 도시 개조를 배울 것을,요코하마에서는 반도체 휴대폰에 이어 디스플레이도 글로벌 톱으로 키울 것을 각각 강조했다. 주문은 다양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금의 모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하나였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 복귀에 따라 경영 일선 퇴진으로 인해 마무리하지 못한 창조 경영이 새로운 버전으로 탈바꿈해 진행될 것"이라며 "신경영 발표 때와 같은 과감한 행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