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되짚어보면 운명이란 게 강하게 나를 잡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나윤석씨(42)는 10살 때인 1977년 10월31일,집 뒤켠 양계장 마당에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관용차를 갖고 왔을 때 운명을 직감했다. "새한자동차(옛 대우자동차의 전신)의 '레코드 프리미어'였어요. 그때부터 줄곧 바퀴달린 놈들한테 정신이 팔렸습니다. "

재수로 조선공학과에 들어간 것 빼곤 그의 인생은 늘 자동차와 함께했다. 1991년 4월 그처럼 '자동차병(病)'을 앓던 14명과 함께 '달구지'라는 PC통신 동호회를 만들었다. 자동차와 관련된 기술 문서를 번역하는 일을 프리랜서로 하다 자동차 튜닝 브랜드를 들여와 창업까지 했다. 37살의 늦깎이로 폭스바겐코리아에 입사,프로덕트 매니저(부장)로 일하고 있는 것 역시 그의 인생 행로상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것처럼 차가 좋았어요. 또래 남자아이들이 로버트 태권브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저는 버스를 스케치북에 그리곤 했습니다. " 경기도 하남이 집이던 초등학생 나윤석은 천호동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신진자동차(쌍용자동차의 전신)가 만들었는데 머플러가 옆에 달린 게 인상깊었어요. 창문도 약간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어 굉장히 파워풀하게 느껴지더군요. " 운전석 옆에 딸린 조그만 조수석은 늘 그의 차지였다. 나윤석은 운전수를 따라 글로브 박스를 돌리며 언젠가 도로 위에서 마음껏 달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달구지'를 만들면서 나윤석의 인생은 좀 더 자동차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요즘 나오는 온라인 카페들의 효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달구지가 나온 다음에 천리안 '차사랑',나우누리 '유니카'가 나왔는데 여기에서 각종 카페들이 분화됐습니다. "

달구지 창립 멤버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한의사,학원원장,치과기공사,대학생 등이 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뭉쳤다.

탄천교 인근 한강준공기념탑이 1주일에 한 번씩 있는 오프 모임 장소였다. "차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서로 얘기했습니다. 차가 있는 사람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이니까 요즘처럼 한 차종만 고집할 이유는 없었어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경험,레이싱 경주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선망의 대상이던 수입차를 타 본 사람이 오면 완전히 신(神) 대접을 받았지요. "

동호회 1세대로서 그는 요즘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 온라인 카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는 엄청나게 많아졌어요. 하지만 깊이와 뜨거운 가슴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손에 기름때 묻혀보고 고민 끝에 나온 한마디와 생각나는 대로 쓴 댓글이 같은 취급 받는 게 아쉽고,자동차를 친구가 아닌 노예 취급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1990년대와 지금을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시절엔 자동차 자체에 열광한 데 비해 지금은 차를 도구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차를 갖고 여행을 가거나,튜닝을 서로 자랑한다거나 모두 마찬가지예요. "

요즘도 자동차를 좋아하는 몇몇 지인들과 소모임을 하고 있는 나 부장은 자동차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한결 같은 충고 몇 가지를 한다. "저는 차를 고생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일부러 극한의 한계까지 차를 달리고,멀쩡한 차들을 뜯어서 화장을 하는 것 말입니다. 차를 친구라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그리고 그룹 드라이빙도 절대 안 합니다. 열정만 앞서서 가슴에 터보를 다는 초보들이 있곤 했는데 꼭 사고가 나더군요. "

나 부장이 가장 좋아한 브랜드는 폭스바겐이다. 그래서 직장도 폭스바겐코리아를 택했다. "겉모습의 화려함보다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엔지니어링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기계장이로서의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

현재 타고 있는 차에 대해 물었다. 뜻밖에도 "회사에서 나오는 차 외에 제 개인 명의로 보유한 차는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사봤자 차고에 방치할 게 뻔한데 친구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간혹 1년에 5000㎞밖에 안 탔다고 비싸게 나오는 중고차를 볼 때가 있는데 저는 그 차를 좋게 안 봅니다. 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차는 어딘가 결함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