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를 두 달 동안 쓰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많은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가 되었고,평소 읽지 않고 놓아둔 이런저런 책들도 뒤적여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책과 고전에 대해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우선 책에도 시대상에 따른 유행이 있고,그 유행은 의외로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IT(정보기술)혁명이 시작된 1990년대 이래 정보통신 신기술과 정보의 권력,무선인터넷 혁명 및 그 주인공들인 게이츠,좁스,발머,구글의 창업자들 등에 대한 책이 가히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1997년 시작된 외환위기를 전후해서는 식자들 사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한편으론 퇴직 당하지 않고 사는 '자기계발'에 대한 책들이 서점가를 풍미했다.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는 '부자되는 법' 같은 재테크와 금융에 대한 서적,워런 버핏 같은 가치투자 선도자들이 뜨거운 주제가 됐다가 작년 말 금융위기 이후에는 좀 뜸해진 것 같다. 반복되는 사회 경제적 위기와 제도의 실패 속에서 사는 것에 지쳐서인지 요즘 화두는 수양,마음공부,자기성찰 등 다소 종교적인 주제가 많은 것 같다. 유행에 따라 부침하는 수많은 베스트셀러 중에서 수십 년 후에도 고전으로 살아남을 책은 과연 얼마나 될지.

또 한 가지 느낀 것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인스턴트 고전'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만화로 된 삼국지,수호지 등 중국의 고전 소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치더라도 축약본으로 된 세계문학전집이나 '만화 세계역사전집'은 이제 웬만한 중 · 고등학생의 책꽂이에는 필수품이 되다시피 했다.

고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높이 평가되며 시간과 유행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는 가치가 담긴 작품이다. 대부분 고전은 저자가 의도한 내용이 치밀하고 예술적으로 담겨 있으며,역사서의 경우에도 다양하고 해석이 상충될 수 있는 사실이 혼재된 경우가 허다한데 축약판과 만화가 과연 고전에 함축된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외국 대학의 경우 전공을 막론하고 고전을 원문(原文)으로 읽고 소화해야 하는 '문명사(Contemporary Civilization) 강좌'가 필수과목으로 돼 있고,1학년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과정이다. 축약판,만화판 고전이 난무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참된 사고력이나 지적능력을 기르는 점에 있어서는 과연 어떨까. 요즈음 문학,역사,철학 등 대학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크게 고조되고 있고,각종 인문학 특설강좌에는 수강자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전에 담긴 지혜까지도 인스턴트 식품처럼 압축해서 쉽고 빠르게 섭취할 수 있다고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시점인 것 같다.

박철원 <에스텍시스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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