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30분이면 해가 기우는 영국 런던의 겨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스산하고 어둡다. 연구실에만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럴 때면 가까운 박물관에 들러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머리도 식히고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특히 대영박물관은 훌륭한 재충전의 장소다.

그러나 대영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전시된 방대한 양의 인류 보고에 대한 자세한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를 영어를 비롯한 3개 언어로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일부터 대영박물관이 한국어 안내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최근 박물관을 찾았다. 웅장한 파르테논신전의 조각상 앞에서 멀티미디어 가이드 기기를 켜자마자 들려오는 친근한 모국어에 일종의 전율마저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짜릿한 느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파르테논신전의 조각상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단서를 제공한 로제타석,고대 이집트의 생활상을 총천연색으로 보여주는 네바문 신전,그리고 한국관의 아미타불경까지 세부적인 설명을 모국어로 체험하면서 새로운 작품 안내 서비스가 앞으로 이곳 대영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인가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PDA형 멀티미디어 가이드는 중요한 정보를 사진과 함께 보여줘 각 유물들의 세부적인 정보와 당시 역사적인 맥락 등을 쉽게 알아보도록 돼 있었다.

이처럼 대영박물관을 좀 더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아닌 우리나라 기업이다. 대한항공이 기존 3개 언어로만 작품 안내서비스가 되고 있던 대영박물관에 한국어를 비롯해 8개 언어서비스를 추가한 것이다. 실제 그날 전 세계 관광객들이 우리 국적 항공사의 로고가 선명한 멀티미디어 작품안내 가이드 기기를 손에 쥐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동안 대영박물관이 휴식처이며 사색의 공간이 되었다면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된 한국어 안내 서비스는 나에게 자긍심이자 자랑스러운 동반자가 될 것이다. 박물관을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연구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다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문화의 심장부에서 만난 우리 모국어의 힘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