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서울 테헤란로를 가득 채웠던 벤처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술력만 앞세우다 10년이 채 안 돼 몰락한 벤처기업의 빛바랜 성공신화는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이 와중에도 단일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 우뚝 선 벤처기업이 있으니 바로 휴맥스다. 벤처 1세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휴맥스는 현재 창업 20년 만에 매출 8000억원을 올리며 디지털 셋톱 박스 제조기업의 선두에 서 있다.

디지털 셋톱 박스(Digital Set-Top Box)란 일반 TV에서 디지털 방송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변환장치다. 휴맥스의 이름은 국내에선 생소한 편이지만 12개국에 법인을 두고 81개국에 수출하는 회사다. 매출액의 95%를 해외에서 거둬 들여 오히려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이런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단순한 기술력'보다는 시장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시장에서 먹히는' 기술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휴맥스가 처음부터 시장에 귀를 기울였을까? 서울대 출신의 석 · 박사 7명이 휴맥스의 전신인 '건인 시스템'을 설립할 때만 해도 그들에게 시장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기술'에만 매달려 첫 제품 MDS(Micro-processor Development System)를 출시했지만 소비자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다 공장 자동화를 위해 만든 제품에 들어간 추가 기능 '영상 위에 글씨를 쓸 수 있는' 기술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우연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방 반주기에 꼭 필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산업용 전문가 제품을 만들던 휴맥스는 주저없이 노래방 반주기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의 90%를 차지할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휴맥스 입장에선 최초로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내놓아 거둔 성공이었기에 의미가 컸다.

언제나 시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휴맥스의 특성은 유럽 진출에서도 잘 나타난다. 잘나가던 노래방 기기사업에서 디지털 셋톱 박스로 전면 전환키로 한 것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결정이었다. 실제 아시아에는 아직 시장조차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유럽과 북미 시장은 이미 필립스 모토로라와 같은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었다.

틈새시장 진출을 위한 휴맥스의 노력은 치열했다. 각종 박람회에서 셋톱 박스가 뭔지도 모르는 개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품의 필요성부터 설명하는 '교육 마케팅'을 실시했다. 소규모 중계유선업자 등과 파트너십을 맺어 시장 변화에 공동으로 대응했다. 이렇게 현지에서 발로 뛰는 노력을 한 결과 유럽 시장에서 1%에 불과하던 틈새시장은 20% 규모로 성장했다. 이 시장에서 휴맥스는 점유율 50%로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IGM 세계경영연구원 조미나 상무 · 안보령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