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을 준비하는 기업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이 제품이 팔릴까'라는 것이다. 개발자들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 제품은 된다'는 믿음으로 죽기살기로 밀어붙이지만 시장 반응은 참담한 수준일 때가 많다. 정반대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도리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일본 올림푸스의 하이브리드 카메라 '펜(PEN)'이 대표적인 예다.

펜의 국내 출시를 앞둔 지난 7월14일.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은 귀를 의심했다. 1000대 한정으로 예약판매를 시작한 지 불과 5시간 만에 준비한 물량이 모두 나간 것.기록은 정식 출시 이후에도 이어졌다. 수백 대 한정으로 홈쇼핑에 물건을 내놓자 2분 만에 전량이 매진됐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의외의 성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고가의 DSLR(일안반사식카메라)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여성 소비자들을 겨냥한 철저한 전략과 전술의 성공으로 평가받는다.

시장정체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시장 규모 축소는 요즘 카메라업계가 마주한 최대 난제이다. 카메라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고가의 렌즈교환식 카메라인 DSLR 시장은 지난해 838만4000대에서 2012년께엔 751만2000대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매출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카메라업계가 노린 것은 틈새시장이었다. 일명 '똑딱이'로 불리는 일반 콤팩트 디지털카메라와 DSLR 카메라 사이의 중간 제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카메라업체들은 렌즈를 바꿔 달 수 있는 DSLR의 장점에,조작하기 쉬운 일반 디지털카메라의 강점을 더한 '하이브리드' 카메라를 구원투수로 여겼다. 제일 처음 도전장을 내민 곳은 일본 파나소닉.지난해 루믹스 G1을 일본 시장에 내놨지만 반응이 좋지 않아 한국 진출을 미뤘다. 다음 도전자는 올림푸스였다. 지난해 6월 하이브리드 카메라 개발을 맡은 스키타 유키히코 총괄책임자는 고민을 거듭했다. 파나소닉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만 신(新)시장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블랙칼라 워커 장벽을 뚫어라

펜 개발팀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DSLR 시장의 주 소비자층을 분석했다. 이들이 눈여겨본 것은 '블랙칼라 워커(Black Collar Worker)'층.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블루칼라와 달리 블랙칼라 계층은 안정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로 관심 있는 분야나 취미활동에 선뜻 월급 3분의 2 이상을 쏟아붓는 구매력이 있다. 올림푸스는 전문직 남성들로 채워져 있는 블랙칼라 워커층에 여성 소비자들을 포함시켜야 카메라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목표를 설정한 올림푸스는 곧바로 구매력이 강한 여성 소비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전략을 짰다. 올림푸스가 고안한 대안은 스타일이었다. 여성 소비자들의 마음을 한번에 살 수 있도록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선 파격이 필요했다. 올림푸스는 DSLR 카메라의 고유명사인 '검은색'을 과감히 탈피해 카메라 본체 색깔을 흰색과 은색으로 바꿨다. 여성들도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크기를 DSLR보다 58% 줄이고,무게는 30% 가벼운 335g 수준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기능은 기존 DSLR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230만 화소에 초당 3장의 고속연사, HD(고화질) 동영상 촬영 기능 등은 그대로 가져갔다.

감성마케팅으로 이미지를 만들라

제품 준비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자 올림푸스한국은 감성마케팅에 나섰다. 사진작가 조선희, 패션 디자이너 장광호,푸드스타일리스트 박재은씨 등을 기용해 출시 한 달 전부터 입소문 마케팅을 벌였다. 단순히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채용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펜 마니아'라고 부르는 전문가들을 대거 등장시켜 소비자들에게 신제품 정보를 전파하도록 했다. 프랑스 패션브랜드인 루이까또즈와 손잡고 펜 전용 카메라백을 내놓는 등 액세서리 판매도 개시했다.

올림푸스한국의 마케팅은 적중했다. 값이 100만원을 훌쩍 넘었지만 여성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펜은 국내 출시 4개월 만에 7000대 이상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펜을 사간 고객들의 40%가 여성이었다. 제품 컨셉트와 마케팅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이 덕에 국내 DSLR 시장에서 캐논(56%)과 니콘(22.9%)에 이어 3위에 머무르던 올림푸스한국(10.2%)은 단박에 하이브리드 카메라 시장이라는 새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방일석 사장은 "여성 소비자들을 끌어안기 위해 휴대성을 강조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더하면서 하이브리드 카메라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올림푸스한국은 하이브리드 카메라 시장을 이어가기 위해 최근 뷰파인더를 탑재한 펜 E-P2를 내놨다. 기존 펜 제품엔 없던 144만 해상도를 갖춘 뷰파인더를 달아 손쉽게 원하는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