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예금 등 거래 기록이 사라지고 입출금이 정지된다. 심장박동 모니터 등 병원 기계가 멈춘다. 시설통제 장치가 엉뚱한 배출밸브를 연다. 어쩌면 방사능이 누출될 수도 있다. 발전소가 폐쇄돼 전기 공급이 끊길지 모르니 양초와 손전등을 준비해야 한다.

1999년 널리 퍼졌던 Y2K (밀레니엄 버그) 발생에 따른 가상 시나리오들이다. 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일으킬지 모른다던 치명적인 문제는 이 밖에도 수없이 많았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이라고 했지만 다들 세상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는 게 아닌가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사전에 하도 철저하게 대비한 덕인지 알 길 없지만 실제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이 Y2K 파동을 비롯 백색가루 기피증을 일으켰던 탄저균 테러와 21세기 페스트일지 모른다던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 · 광우병 · 조류독감에 대한 우려 등 10가지를 '과장된 공포'로 선정했다.

Y2K 사태에서 보듯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불안은 공포를 부풀리고,부풀려진 공포는 알 수 없는 증오감과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을 낳기도 한다. 지난해 광우병 파동 당시 벌어진 일들은 그 대표적인 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자신이 탄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훨씬 낮다는데도 엄마가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위현장에 나가도록 만든 건 과장된 공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도 남았다.

신종플루도 어쩌면 이런 과장된 공포의 하나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잦은 정책 변화와 관련 부처 간 갈등 양상,리스크 회피에 따른 의사소통 부재,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모호성 등 위기대응 능력이 체계화되지 못해 불필요한 공포와 두려움을 키웠다"는 것이다. (연세대 염유식 교수)

두려움은 문제의 정도보다 생소함에서 비롯되는 수가 잦다. 무슨 문제든 솔직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부정적 사실을 극대화한 내용이 쏟아지고 그런 것일수록 사람들에게 잘 먹히기 쉽다. 경제에서도 가장 무서운 게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 이를 겨냥,비관적 전망을 내놓는 미스터 둠도 끊임없이 나온다. 무시하면 안되겠지만 너무 솔깃해 하는 건 금물이다. 국가도 개인도 마찬가지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