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는 이제 40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욕에 불타 거리로 나섰고,민주화가 정착되자 가장 먼저 분배의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혹심한 경쟁을 겪어야 했던 세대,경쟁에서 겨우 살아남고 보니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가장 먼저 가장 광범위하게 조직에서 퇴출되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베이비 부머들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기록된 베이비 붐 세대에 대한 단상의 일부이다.

전후(前後) 복구기 다산의 시대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내년이면 은퇴를 시작한다. 베이비 붐 세대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학자에 따라 이견(異見)이 있긴 하나,1955년부터 1963년 출생까지를 베이비 붐 세대로 보는 관례에 따른다면,매해 95만명에서 100만명씩 태어났던 부머들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은퇴 폭증 내지 노후 부양 대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인구학자들은 베이비 붐 세대가 동일한 생애주기를 지나가면서 교육과 취업,결혼과 출산 시장을 향해 새로운 요구를 창출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회 무드를 지배한다는 점에 주목해왔다. 실제로 미국에선 베이비 붐 세대가 사춘기를 지나가던 60년대는'반항의 시대'로,결혼과 커리어에 몰입하던 70년대는'혼돈의 시대'로,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소비의 주체로 부상하던 80년대는'탐욕의 시대'로 그리고 중년기를 지나가는 90년대는'불안과 조바심의 시대'로 명명되었고,이제 베이비 붐 세대가 노년기에 접어드는 2000년부터는'잿빛 아메리카'란 별칭을 얻었다.

반면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는 수적으론 다수 집단을 구성함에도 사회적으론 '소외된 소수 집단'으로 남아있다는 인상이 짙다. 근대화 세대의 자녀들로서 부모의 그림자에 묻혀 지내고,갑자기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 때는 구조조정 바람에 휘둘리다,뒤이어 386세대를 중심으로 치고 올라온 세대비약론에 떠밀려 무대 뒤편으로 물러난 것도 잠시,명실공히 은퇴를 기다리는 신세가 곧 부머들의 자화상 아니겠는지.

한국의 베이비 부머들에겐 1인당 GNP 80달러 수준의 최빈국(最貧國)에서 태어나 과밀학급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지나가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고,유신세대로서 민주화를 향한 좌절을 감당해야만 했던 청년기의 아픔 또한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는 고도성장의 열매를 맛보기도 했지만,동시에 "우리 부모가 나를 조금만 더 밀어주었더라면 지금보단 훨씬 출세했을 텐데"라는 회한이 남아 있기에,자녀교육을 위해 전폭적 투자를 아끼지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덕분에 고령화에 가속이 붙은 요즈음,노후를 준비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 이후에도 최소한 20여 년간의 '빈둥지 가족'(자녀를 모두 결혼시킨 후 노부부만 남게 되는 가족) 시기를 맞게 된 것이 우리네 부머들의 현 주소인 셈이다.

와중에 한국의 노동시장에선 주목할 만한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출산 및 양육기의 여성 취업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나 50대 이상 여성의 재취업률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은퇴한 남편 대신 노후 생계를 위해 부인이 생업에 뛰어들고 있는 까닭인데,50대 여성에게 주어지는 취업 기회야 '돌봄 노동'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있을 턱이 없지 않겠는지.

평생을 가족 위해 몸 바쳐 일해 온 베이비 붐 가장들,은퇴로 인한 경제적 타격 못지않게 심리적 위축과 자신감 상실로 인해 우울증이 깊어만 간다는 소식이다. 더 늦기 전에 고령 초기를 지나가는 부머들의 생애주기에 닥친 다양한 위험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국가 기업 가족 모두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