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량과 물가 중간엔 '파급경로'가 존재한다
[경제교과서 친구만들기] (38) 통화정책 ②
"우리가 통화지표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를 버렸다. (We didn't abandon the monetary aggregates,they abandon us.)"

약 15년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했던 제럴드 보위(Gerald Bouey)는 1980년대 캐나다가 통화정책의 운영체계 중 하나인 통화량 목표제(monetary targeting)를 포기할 당시 위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통화정책의 운영체계(monetary policy framework)는 통화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방식과 절차에 관한 제도적 틀로 정의하는데,일반적으로 지난주에 공부했던 정책수단 · 운용목표 · 중간목표 · 최종목표 이 4가지로 구성된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가안정을 최우선적인 최종목표로 채택하고 있으며 정책수단과 운용목표 또한 국가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통화정책의 운영체계는 중간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통화량 목표제는 통화량의 증가율을 중간목표로 해 최종목표를 달성하려 하는 통화정책의 운영체계를 의미하며,1970년대 후반에 많은 국가들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많은 국가들이 통화량 목표제를 채택한 이유는 1960년대부터 경제학계에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을 필두로 하는 통화주의자들(monetarists)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화주의자들은 물가와 통화량 사이에 안정적이며 밀접한 관계가 성립하므로 통화량의 조절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고 역설했는데,이들의 주장은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화폐적 현상이다(inflation is always and everywhere a monetary phenomenon)"란 프리드먼의 말로 요약이 된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길고 다양한 경로를 거쳐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통화량 목표제 하에서는 결국에는 통화량이 물가를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에 중간의 파급경로(transmission mechanism)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1970년대에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 인플레이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통화량 목표제는 곧 결함을 드러냈다.

1980년대부터 금융혁신과 금융규제 완화 등으로 통화량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제어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졌고,통화량과 최종목표인 물가 사이의 관계도 불안정해졌다.

보위 총재가 통화지표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 변화 속에서 통화량 목표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통화량과 물가 간의 관계가 불안정하다면 통화정책의 여러 파급경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 경로들 중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금리경로인데,이자율의 조정은 가계와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어 총수요에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은 아마도 그동안 TV나 신문 등을 통해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변경했다는 소식을 많이 접했을 것이다.

정책금리란 매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이자율을 의미하는데,현재의 정책금리는 한국은행이 금융기관들을 상대로 거래를 할 때 기준이 되는 단기이자율인 '한국은행 기준금리(약칭 기준금리)'이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를 결정해 공표하면 금융기관들 사이의 자금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주어 시장금리 또한 하락하게 된다.

시장금리의 하락은 가계와 기업이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드는 비용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므로 기업의 투자와 가계소비가 늘어 총수요는 증가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기준금리 변동이 이렇게 총수요 변동으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총수요가 움직이려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정할 때 금융기관들이 한국은행의 의도에 따라 즉시 반응해 시장금리가 변동되고,금리 변동의 효과가 소비 · 투자 등의 실물부문으로 파급되어야 하는데 경제의 여건에 따라 금융시장과 실물부문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금리경로 이외의 통화정책의 파급경로를 간단히 살펴보면 통화정책은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의 가격을 변화시킴으로써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자산가격경로),국내 금리변동을 통해 해외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거나 국내 자금이 해외로 유출되는 양을 조절함으로써 환율을 변화시켜 대외거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환율경로).

또한 통화정책은 기업과 가계에 대한 금융기관의 대출 태도를 변화시켜 총수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신용경로),경기전망 및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를 변화시켜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기대경로).

통화정책의 파급경로는 이와 같이 다양하기 때문에 통화량이 아닌 다른 변수를 선택하더라도 하나의 변수를 중간목표로 채택해 중점 관리하는 운영체계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새로운 운영체계가 물가안정 목표제(inflation targeting)인데,물가안정 목표제는 중앙은행이 특별한 중간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달성해야 할 물가목표치를 미리 대중들에게 공표하고 이를 기준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제도이다.

즉,중간목표 없이 통화정책 수단을 사용해 물가목표치를 직접 달성하고자 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가상승률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의 결정요인을 파악하고 미래의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은행은 통화량 · 금리 · 환율 · 자산가격 등 다양한 거시변수들을 활용해 인플레이션을 예측하는데,이때 활용되는 거시변수들은 정보변수(information variables)라 부른다.

물가안정 목표제 하에서 통화량은 중앙은행이 주의 깊게 지켜보는 정보변수 중 하나에 해당하므로 특정 수준의 목표치를 정해 놓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는 통화량 목표제와는 구분이 된다.

물가안정 목표제는 1990년대부터 뉴질랜드(1990년)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이 도입했으며 우리나라 또한 1997년 말 한국은행법 개정 때 물가안정 목표제를 도입해 1998년부터 운용하고 있다.

통화량 목표제의 대안으로 나타난 물가안정 목표제는 대중들에게 명확한 물가목표치를 제시함으로써 그동안 물가와 경기변동을 안정시켰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통화정책이 자산가격 버블 등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었으며,물가수준 목표제(price-level targeting) 등 새로운 통화정책 운영체계에 대한 논의도 진행이 되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는 올해 4월에 스웨덴 중앙은행 총재인 스테판 잉브스(Stefan Ingves)가 대중들과의 온라인 채팅에서 과거 대학교수였던 자신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매일 매일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답변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금융위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료들,즉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이 말에 얼마나 동의할지 모르겠다는 평을 내놓은 바 있다.

앞으로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의 복잡한 미로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자.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전문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