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이 산업계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갑(甲)과 을(乙)의 종속적 계약관계에 있던 대기업ㆍ중소기업이 '상생경영'을 통해 글로벌 생존력을 높이고,동반성장의 발판을 다져가고 있는 것.지난 수년간의 경영실험을 통해 윈-윈(win-win)효과가 검증되면서,상생경영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상생협력 모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현금결제 등 자금운용에 숨통을 틔워주는 선심성 지원 일색에서 벗어나 기술개발,인력재교육,경영노하우 전수 등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을 넘어 대기업과 대기업 간 상생협력도 확산되는 추세다.

늘어나는 상생협력…30대그룹 작년보다 28.7% 급증

주요 대기업들은 중소협력업체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핵심 파트너로 인식하면서 자발적으로 상생경영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30대 그룹의 상생협력 지원금은 매년 급증하고 있고,상생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있다.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전담팀이 신설되는가 하면 상생경영 실적이 담당 임직원의 인사 평가에까지 반영되기도 한다. 상생협력 경영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30대 그룹의 대 · 중소기업 상생협력 지원규모는 2조6002억원으로 작년에 비해 28.7% 증가했다. 작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인한 불황공포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원은 오히려 늘어났다.

올해에는 10대 그룹 위주의 지원에서 벗어나 20~30대 그룹의 상생협력 지원이 크게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2005~2007년 지원실적에서 20~30대 그룹이 차지한 비중은 16%에 그쳤지만 올해는 42%로 증가했다. 지원 유형별로는 시설 · 운전자금 지원,경영혁신 등 경영지원이 전체 지원금액의 71.3%(1조8534억원)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100% 현금결제ㆍ상생펀드…프로그램도 각양각색

상생협력 지원유형도 각 기업들의 산업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다. 우수 프로그램들은 벤치마킹 대상이 돼 다른 기업들에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현대 · 기아자동차는 협력업체들의 품질개발,교육훈련,경영활동 지원 등을 통해 자립형 중소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납품대금을 100% 현금으로 결제하고 무담보 신용대출을 지원하는 한편 300억원 규모의 상생협력 펀드를 조성했다. 기술개발이 어려운 중소 협력업체에 신기술 제안 및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2009 연구개발(R&D) 협력사 테크데이' 행사도 열었다.

SK그룹은 지난 6월 그룹 단위의 상생경영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SK상생경영위원회'를 신설했다. 또 IBK기업은행과 각각 600억원을 출연,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협력업체에 지원하는 '상생펀드'를 만들었다. 총 1200억원 중 528억원은 이미 99개 중소 협력업체에 지원됐다. 연말을 앞두고 자금수요가 많은 협력업체들이 평균 4억8000만원을 지원받은 셈이다.

GS는 지난 8월 GS칼텍스를 포함한 그룹 내 9개 계열사가 1000여개 협력업체와 'GS 상생협력 및 공정거래 협약식'을 갖고 상생펀드에 390억원(GS칼텍스 200억원)을 출연했다. GS는 1997년 12월 일찌감치 국내 최초로 입출금 자동화시스템을 구축,각종 대금을 협력회사의 지정계좌에 자동 입금 처리함으로써 협력회사가 수금을 위해 모기업을 방문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STX그룹은 계열사별로 관리 운영하고 있던 협력회사를 통합한 'STX 멤버스'를 출범시키고 다양한 상생경영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생존 위해서라면…경쟁자도 파트너로 '적과의 동침'

대기업과 대기업 간 상생협력도 늘어나고 있다. 같은 시장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업체들도 살아남기 위한 생존동맹을 맺고 있다. 포스코는 이달 초 세계 최대 에너지 수송용 강관 시장인 미국에 현지 합작회사인 USP사를 설립했다. 포스코가 손을 잡은 업체는 미국 최대 철강사인 US스틸과 국내 강관 전문업체인 세아제강.포스코는 미국 현지 파트너인 US스틸과 강관 제조기술을 보유한 세아제강과의 합작을 통해 API강관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코오롱과 SKC의 폴리이미드(PI) 필름 합작사 설립은 대기업과 대기업 간 대표적인 상생협력 사례다. 양사는 지난해 시장공급과잉에 대응하고 규모의 경제를 키우기 위해 PI 필름사업부를 각각 분사,50 대 50의 지분투자로 합작사를 세웠다.

현대오일뱅크 삼성토탈 LG화학 호남석유화학 등 대산화학단지내 업체들의 상생협력 모델도 눈에 띈다. 대산단지 내 입주업체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2006년부터 공동원료 사용,폐자원 재활용 등 8개의 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반신반의하며 협력사업을 시작했던 각 업체 실무 담당자들조차 원가절감 효과에 놀랄 정도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