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는 물론 80년대 학번까지 남자 170㎝는 충분히 큰 키였다. 그도 그럴 것이 70년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6.2㎝였다. 170㎝를 넘긴 건 90년(170.1㎝).여자 평균이 160㎝를 넘은 건 그보다 10년 뒤인 2000년(160.4㎝)이었다. 현재는 남자 173.9㎝,여자 161.2㎝로 돼 있다.

현실이 이런데 공중파방송 출연자가 "키 작은(180㎝ 미만) 남자는 루저(loser · 패배자)"라고 발언,이 땅 남자 대부분을 멍하게 만들었다. 당사자가 사과하고 방송사 측에서도 제작진 교체 등 수습에 나섰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잇따르는 등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대상이 불특정 다수여서인지 일종의 해프닝처럼 지나가는 듯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이번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방송의 외모지상주의가 도를 지나쳐 외모차별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생기면 선,못생기면 악'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못생긴 사람은 웃음거리를 넘어 조롱거리가 돼도 괜찮다는 식이다.

둘째,네티즌의 반응과 인터넷의 무서운 전파속도다. 방송 하루 만에 루저란 단어를 모르는 젊은층이 없을 정도였다. 셋째,인터넷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사실이 새삼 드러났다. 문제의 여대생은 대학과 전공,미니홈페이지에 올린 글까지 공개되는 등 그야말로 샅샅이 털렸다.

넷째,똑똑하고 당당한 스무 살의 자의식과 가치 판단력은 어디 갔는지 의문이다. 엉겁결에 대본대로 말했다지만 내 키가 크니 작은 남자는 곤란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작은 남자는 패배자라고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만일 기준치가 180㎝가 아닌 175㎝나 170㎝였으면 사태가 이 정도로 쉽게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은 또 무엇보다 남자의 자격과 여자 눈높이의 기준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공개한 대졸 남녀 배우자감의 기준은 남자의 경우 키 174.4㎝ 연봉 4334만원,여자는 키 162.6㎝ 연봉 2808만원이었다. 초혼 연령 평균은 남자는 키 173㎝ 연봉 2994만원,여자는 161㎝ 연봉 2103만6000원이라는데 말이다.

희망사항과 현실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있는 셈이다. 드러난 건 키와 돈이지만 얼굴 생김새도 볼 테고 학력(학벌) 직업 가족관계 성격 모두 따질 것이다. 당연히 성사되기 쉽지 않을 터.게다가 여성은 자신의 환경(조건)에 상관없이 원하는 남자의 환경은 비슷하다고 한다.

키도 크고 돈도 잘 벌면 좋을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환경을 원하는 것을 나무랄 순 없다. 그러나 결혼해서 살아본 사람은 다 안다. 겉에 나타난 조건만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조건이 좋을수록 참을성은 떨어지고,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키 작은 남자들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그 결과 더 잘사는 수가 많다는 것도.

그러니 중년주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키보다 성격이 중요하다. " 마음이 편해야 한다는 얘기다. 판검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도 예비 장모의 이런 생각 때문일지 모른다. 남자들도 안다. 살아보면 외모보다 마음 씀씀이가 넓고 가치관이 비슷해야 편안하다는 걸.

'젊은층에 넘치는 건 도전의식,모자란 건 적응력'이란 조사결과가 있다. 직장에서만 그러하랴.결혼생활에서도 다르지 않다. 남자의 자격은 키와 학벌보다 상황이 어떻든 핑계대며 도망치지 않고 도전하되 때로는 참고 적응하면서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와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에 있다. 그런 마음은 조건만 따지는 눈으론 결코 발견해낼 수 없다.

조건을 앞세운 눈높이에 맞추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맞춘다 해도 자신 또한 상대가 원하는 조건을 유지하느라 평생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배우자는 동반자이고 따라서 무엇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세상 모든 일에'불수위위지(不隨萎萎地 · 질질 끌려다니지 말라)'라는 말도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