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고 가끔 열도 난다. 기억력도 나빠진 것 같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는데다 변비와 설사가 반복된다. 휴일에 만사 제치고 푹 쉬어보지만 피로와 무력감은 여전하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도 피하기 일쑤다. 일에 대한 의욕도 뚝 떨어졌다. 병원에 가 봐도 딱 부러지는 원인을 찾지 못하니 죽을 맛이다.

이렇게 특별한 질병 없이 심한 피로감이 장기간 지속되는 증상을 만성피로증후군이라고 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기준으로는 '임상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피로가 6개월 이상 이어지는 데다,현재의 힘든 일 때문에 생긴 피로가 아니며,휴식으로 증상이 호전되지 않고,사회생활에 지장을 받는다'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복잡한 세상살이에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으나 당사자에겐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다. 심한 경우 두통 근육통 위장장애 불면증 무력감 기억력 · 집중력 저하 어지럼증 등 온갖 증상이 나타난다. 병가를 내 한 달쯤 푹 쉬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도 없다. '꾀병 부리지 말라'는 주변의 농담도 부담스럽다. 미국에만 100만명의 환자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7만1000여명이 진료를 받았을 정도로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처럼 진단과 치료가 까다로운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의 상당수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 받고 있다. 미국 네바다주 화이트모어피터슨 연구소의 주디 마이코비츠 박사는 만성피로증후군 환자 101명과 300명을 대상으로 두 차례 조사했더니 각각 67%와 98%에게서 '친이종쥐백혈병바이러스(XMRV)'가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건강한 사람에게선 불과 3.7%에서만 이 바이러스가 나왔다. 의학계에서는 추가 연구에 따라 만성피로증후군 치료의 길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위기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4000여종으로 추정된다. 이들중 일부는 인체에 들어와 여러가지 질병을 일으킨다.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신종플루를 비롯 홍역 풍진 소아마비 B형간염 광견병 대상포진 등은 모두 바이러스 질환이다. 에이즈나 에볼라 라사열 사스 바이러스 등에 대해서는 아직 백신조차 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여기에 만성피로증후군도 바이러스에 의한 질환일 가능성이 높다니 의외다. 고등동물이라는 인간이 핵산과 소량의 단백질만으로 구성된 바이러스에 쩔쩔맨다는 게 아이러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