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과 해외투자가 존재하는 한 기술이 국제적으로 확산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정 시점에서 첨단기술도 이런 과정을 거쳐 범용적인 것으로 변해 가고,후발국들이 그 기술들을 획득하면서 선발국과의 기술격차는 줄어든다. 이는 국제경제학 이론으로도 그렇고,실증적으로도 증명된 바다.

LG디스플레이에 이어 삼성전자도 중국에 LCD(액정표시장치 · Liquid Crystal Display) 패널공장을 짓겠다고 나섰다. 기업들은 정부보다 더 변화에 민감하고 계산도 빠르다. 중국 LCD TV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데다 중국과 경제협력을 가속화하고 있는 대만,그리고 일본 경쟁업체들이 중국으로 가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 통상마찰 가능성도 기업으로서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내 LCD업체들이 투자패턴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업들 맘대로 중국에 갈 수가 없다. LCD 등은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돼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승인권을 가진 정부는 중국 진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국내투자 저하,핵심기술 해외이전 등을 우려하며 기업에 보완책을 요구했다. 핵심기술보호방안,장비 · 재료업체 진출기회 제공,국내 고도화투자 확대 등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정부는 그런 요구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경우 기술유출이라는 용어가 합당한지 그것부터 솔직히 의문이다. 중국에 짓겠다는 LCD공장이 LG는 8세대,삼성은 7.5세대로 우리가 아니어도 대만 일본 등이 짓겠다는 공장과 다를 게 없고 보면 특히 그렇다. 만에 하나 보호해야 할 기술이 있다면 그건 정부가 걱정 안 해도 해당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게 분명하다.

장비 · 재료업체 동반진출도 그 취지는 좋지만 기본적으로 장비 · 재료업체의 경쟁력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해외진출 기업에 그 부담을 떠넘길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국내 고도화투자도 그렇다. 중국에 LCD공장을 짓겠다고 했을 때 기업으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 부분일텐데 분위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중국에 공장짓는 것 때문에 정부의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기업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할 투자규모에 관한 수치를 만들어 내느라 야단인 것 같다. 이 정도면 기업들은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이 해외투자를 규제하는 법,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느낄지 모른다.

정부가 봐도 LCD 공장의 중국행이 불가피하다면 과감히 기업의 선택에 맡기는 게 좋다. 오히려 정부가 할 일은 그 이후에 있다. 당장 LCD산업만 놓고 보면 국내에서 어떻게 차세대 투자를 촉진하고,취약한 장비 · 재료업체들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지가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크게 보면 LCD의 중국행은 LCD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삼성 LG 등이 글로벌 전략을 다시 짜면서 궁극적으로 국내는 연구개발 중심으로 가겠다는 의도라고 한다면,이는 전자산업,나아가 제조업 전체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시그널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를 제조업 공동화라는 부정적 시각에서만 볼 이유는 없다. 제조업도 진화를 할 수 있다고 본다면,정부는 지금부터 차세대 제조업 정책을 어떻게 끌고 나갈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