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박정희 生家에 450만명 다녀간 이유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한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는 방문객은 올해 9월만 따지면 하루 평균 3000명이 넘는다.

생가 사무소에 따르면 1995년 2만9580명이던 방문객은 해가 갈수록 늘어 이제는 매년 50만명 가까이 찾고 있다.

지금까지 450만여명이 다녀갔다.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방명록에 가장 많이 남긴 말은 "그립습니다"와 "고맙습니다"였다.

이 신문은 생가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의 말을 소개했다.

"여기 달랑 초가집 한 채 말고 뭐가 있습니까. 내가 살던 집도 이랬어요. 우리 세대는 하루 세끼 다 못 먹고 다 어렵게 컸다고. 우리 아들이 카이스트를 나왔는데,입학식 때 학부모 선서를 시킵디다. 거기 '조국의 발전과 명예를 위해서'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래 어렵게 살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국민들 잘 살게 해주려고 카이스트 만들고,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그는 순식간에 눈과 코가 붉어졌다.

생가를 방문하는 이들의 정서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낸 동지를 추억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준 지도자…

박 전 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가차없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지만 서민의 가난 탈출을 꿈꾸고 이를 실현시켰다.

서민들과 막걸리로 어울리는 소탈함과 검소한 생활 등에서는 서민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라는 세 글자는 산업화와 압축 성장,강력한 개발 독재,군사적 가부장주의 등 1960~70년대를 규정한 아이콘이며 '한국적 근대성' 그 자체다.

'박정희'는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의 신화가 됐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는 그 중요성만큼 평가도 예리하게 엇갈린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체험에 따라 극단적으로 미화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얘기하듯 산업화 세력이냐,민주화 세력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랐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재평가 움직임이 일면서 박정희 연구는 이념지향에 따른 논쟁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진보 · 개혁 진영에서도 '박정희 다시 보기'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와 반민주,독재와 저항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그 시대의 복합적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번 생글생글 커버스토리에서는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박정희와 그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다뤘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