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독립운동 동지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22일 밤이었다. 국민회 지부장 김성백의 집에 묵으면서 이발을 하고 사진도 찍었다. 이때 독립운동가 조도선도 합류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지야이지스고역에 잠시 내린다는 정보에 따라 우덕순 조도선을 이곳에 배치해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하면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거사에 나선다는 2단계 작전을 짰다.

26일 새벽 1단계 작전이 무산되자 안중근은 러시아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하얼빈역으로 스며들었다. 9시께 열차가 도착했고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에게 다가가 총을 쐈다. 일본 궁내대신 비서관으로 이토를 수행했던 모리 다이지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작(이토)이 러시아 군대의 우익에서 좌익을 향해 그 전면으로 나가는 순간에 돌연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쓴 사나이가 우리 거류민들의 군집 속에서 나타나 홀연 공작의 배후로 다가갔다. 권총으로 공작의 우측에서 저격하기를 여러 발…'총알 두 개는 가슴에,한 개는 복부에 박히며 이토는 쓰러졌고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쳤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서울과 하얼빈에서 기념식을 개최한 데 이어 '중국인이 보는 안중근'자료집 발간,동상제막식,한 · 중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다. 친필유묵 40여점과 사진 30여점을 보여주는 특별전(26일~2010년 1월24일 · 예술의 전당),하얼빈 의거 현장을 모형으로 재현한 특별기획전(독립기념관) 등도 열리고 있지만 좀 공허해 보인다. 정작 의거 현장 보존 관리가 미흡한데다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하얼빈역 플랫폼엔 총을 쏜 곳을 표시하는 세모와,이토가 서 있던 지점을 알리는 네모의 타일이 있을 뿐 의거 내용을 설명하는 글귀는 없다. 중국이 허가하지 않는 탓이다. 1910년 3월26일 31살의 나이에 뤼순 형무소에서 처형되기 직전 안중근은 면회 온 두 아우에게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부근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국권을 회복한 지 64년이 흘렀으나 우리는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 공동으로 발굴을 추진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세월이 흐를 수록 발굴은 더 어려워 진다. 이유야 어떻든 민족의 영웅이 100년간이나 이역에 묻혀 있다는 건 수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