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일기'(1608~1623년)엔 이런 글이 나온다. '사삼각로권초중 잡채상서세막당(沙蔘閣老權初重 雜菜尙書勢莫當,처음엔 사삼각로의 권세가 중하더니,지금은 잡채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다).' 사삼각로는 사삼(더덕)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바쳤다는 한효순,잡채상서는 잡채로 환심을 얻어 호조판서에 올랐다는 이충이다.

사삼밀전병의 힘도 컸던 듯한데 그걸 누르고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아 판서 자리까지 올랐다는 걸 보면 잡채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잡채 하면 으레 당면잡채를 생각하지만 당시엔 당면 없이 갖가지 채소를 볶은 것에 꿩고기 등 다른 재료를 더했었다고 한다.

조리법에 대한 기록은 1670년께 나온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처음 등장한다. 경북 영양에 살던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가 일흔살 넘어 써낸 이 책에 따르면 잡채는 오이 무 석이 표고 두릅 등 온갖 채소를 볶은 뒤 꿩고기 육수에 참기름과 밀가루를 넣고 끓여 만든 즙을 얹은 다음 맨드라미나 머루로 색을 낸다고 돼 있다.

잡채는 이후 정조대왕의 을묘년(1795년) 현륭원 행차를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당면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면(唐麵)은 감자나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국수인데 이름 그대로 중국면이다. 당면잡채는 1919년 양재하라는 이가 황해도 사리원에 당면공장을 세운 뒤 판매 촉진을 위해 요리법을 개발 보급하면서 생겨 났다는 게 통설이다.

잡채는 무엇으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 재료가 들어가는 만큼 상하기 쉬운 게 단점이지만 한꺼번에 많이 만들기보다 나물은 볶아 놓고 당면만 금방 삶아 비벼 내면 괜찮다. 남은 경우 밀전병에 싸서 겨자 소스에 찍어먹거나 중국식 춘권처럼 튀기면 색다른 요리가 된다.

일본인들은 당면과 함께 잡채를 하루사메(春雨??라고 부른다. 음식 세계화는 식재료 수출과 직결된다. 잡채를 세계화하면 참기름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도 참기름이 있지만 볶아서 짜는 우리 것과 달리 쪄서 짜므로 고소하지 않다.

한식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미국 CNN TV의 한국 특집 프로그램 첫 방송에서 잡채 만드는 법을 직접 시연했다. 외국사람 누구나 좋아하는 만큼 피자나 파스타같은 세계적 요리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 잡채 전문식당이 생길 날을 기다린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