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피겨스케이팅이 처음 소개된 때는 구한말이다. 1894년 겨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청으로 경복궁 향원정에서 첫 시연을 했다. 그모습을 지켜보던 명성황후의 소감은 이랬다. "남녀가 사당패와 색주가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구나. "영국 왕립지리학회 첫 여성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이웃나라들'에 나오는 대목이다.

피겨가 일반에 퍼진 것은 1920년대 회원 8명의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가 탄생하면서부터다. 여자 회원이 없어 남자들끼리 페어나 아이스댄싱을 했다고 한다. 1968년엔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 이광영 김혜경 이현주 등 3명이 참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기반시설과 경험이 없었던 만큼 좋은 성적이 나올 턱이 없었다. 이광영은 남자 26명 중 꼴찌,이현주와 김혜경은 여자 32명 중 31 · 32위를 했다. 대회 실무자들이 한국팀 음악이 엉성하고 잡음까지 나자 원곡을 편곡해 녹음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정도다. 국제대회 첫 입상은 1991년 삿포로 동계유니버시아드 시니어 싱글에서 정성일이 따낸 은메달이다.

여섯살짜리 '꼬마 김연아'가 엄마 손을 잡고 스케이트장을 찾은 건 1996년이었다. 2006 세계 주니어 피겨선수권 우승,2009 세계선수권 우승 등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더니 이번엔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정상에 서면서 그랑프리 6회 연속 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이날 점수210.03은 자신이 세웠던 여자 싱글 역대 최고점을 2.32점 끌어올린 세계신기록이다.

김연아가 '피겨 퀸'에 오른 요인으로는 타고난 신체조건과 운동감각,두둑한 배짱,어머니의 헌신적 뒷받침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엄청난 연습량을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을 만 하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도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라는 저서에서 "연아의 천재성을 하늘에서 내려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습 과정을 딱 사흘만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유일한 결점이 지나치게 연습을 하는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연습벌레라는 설명이다.

4개월 앞으로 다가온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대비해 김연아는 혹독한 훈련에 들어갈 것이다. 지나친 기대로 부담을 주기보다는 차분한 응원으로 힘을 실어줘야 할 일이다. 막 절정기를 맞은 '국민요정'의 앞길에 자칫 방해가 될까 걱정이 돼서 하는 얘기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