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성 해방의 1등 공신은 세탁기.'지난 봄 로마 교황청에서 밝힌 공식 견해다. 세탁기 덕에 여성들이 집안에서 차 한 잔 마실 여유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왜 아니랴.세탁기가 없던 시절 빨래는 실로 힘겨웠다. 한겨울 찬물에 빨래하자면 손은 빨갛게 얼어 터지기 일쑤였다.

쭈그리고 앉아 문지르고 헹구다 보면 다리가 저려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남자에겐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 소설가 천승세씨는 다른 건 몰라도 빨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짜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불감을 짜자면 두 사람이 맞잡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느라 기운을 있는 대로 빼야 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 나오는,개울가 넓은 공터에 가지런히 널린 빨래가 바람에 춤추듯 나부끼는 장면은 아름답지만 그러기까지 여성의 무릎과 허리는 닳고 휘어졌다. 손목은 퉁퉁 붓고.세탁기는 이런 고통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빨래를 남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었다.

빨고 짜는 건 세탁기가 하니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널어서 말리는 것뿐.물론 너는 것도 일이다. 가능한한 반듯하게 널어야 개키기 좋고 다림질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건조기는 이런 수고조차 던다. 근래엔 세탁물이 구겨지던 건조 겸용 세탁기의 단점을 해소시킨 건조전용기까지 나왔다.

마당에 빨랫줄 맬 일도,베란다에 건조대를 놓을 일도 사라지는 셈이다. 편리하고 깔끔하다는 생각이었을까. 미국에선 빨래를 바깥에 너는 건 건조기를 못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여겼다는 마당이다. 그러던 미국에서 빨래 널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관을 해친다고 거의 전 지역에서 빨래 널기 금지 조례를 제정했었는데 에너지 절약과 환경 보호를 위해 널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를 무효화하는 주가 생겨난다는 얘기다. 결국 널겠다는 사람과 '무슨 소리냐,집값 떨어진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의 다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건조기는 좋다. 겨울엔 더 좋다. 널 곳이 마땅하지 않은 주상복합 아파트에선 더더욱 편하다. 그러나 세탁에 건조까지 시키자면 보통 3시간은 걸린다. 전기료도 전기료요,에너지 절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장마철엔 몰라도 보통 땐 햇볕에 말려볼 일이다. 젖은 빨래를 탁탁 털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바싹 마른 걸 거둬들이는 기분도 괜찮다. 주부에게만 맡기지 말고 온가족 모두 거들면 어렵지 않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