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 EU 자유무역협정(FTA)이 가서명됨에 따라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는 한국 제품이 세계 최대 시장인 유럽연합(EU)에서 무관세 혜택을 받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과 유럽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한 · EU FTA 시대를 앞두고 우리 기업들이 명심할 것이 있다.

FTA가 우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정부간 협력을 제도화해 줄 것은 분명하지만,그렇다고 한 · EU FTA를 유럽 시장 진출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는 만병통치약쯤으로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유럽연합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27개의 민족국가가 자발적으로 주권을 내놓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온 연합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공동체에는 외부에서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법규범이 많다. 27개국의 이해를 조정하다 보니 규범 제정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더구나 유럽의 통합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지금도 매일같이 새로운 규범들이 양산되고 있다.

유럽의 통합 과정이 경제를 중심으로 시작된 연유로 경쟁이나 환경 등 기업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서 브뤼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세계 최고 IT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익스플로러 끼워 팔기로 지난 2004년 4억9000만유로라는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 받은 이래 지금까지 EU 경쟁당국을 상대로 힘겨운 방어전을 감내해 오고 있는 것이나,세계 굴지의 자동차 및 항공업계가 온실가스 감축 규제 등 범EU 차원의 환경규제가 자신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브뤼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등이 단적인 예라 하겠다.

브뤼셀 경쟁당국의 칼날은 이미 우리 기업들을 상대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데,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3건의 국제 카르텔 사건에서 우리 대기업들이 부과받게 될 벌금 액수만 최소 12억달러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이 같은 독특한 사정 때문에 브뤼셀에는 1200여개의 공식 로비단체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비공식 로비단체들이 보이지 않는 로비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61개 회원사가 참여하는 유럽 · 일본기업인협회(JBCE)를 통해 EU 정책을 면밀히 모니터하면서 일본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 등 유수의 일본 기업들도 개별 기업 차원에서 EU 집행위에 이익단체로 공식 등록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 140여개 기업이 참여하는 암참 EU 또한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면서 이코노미스트지로부터 가장 효과적인 로비단체로 선정된 바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 분야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이해와 관심은 극히 미미해 보인다. 대사관이 중심이 돼 KOTRA,무역협회와 힘을 보태 유럽연합 내 각종 규제 동향을 모니터하고 정보를 전파해 오고 있으나 기업들 스스로가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행히 올초 우리 기업들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이 브뤼셀에 사무소를 설치하면서 어렵게 첫걸음을 내디딘 바 있으나 아직 갈 길은 요원하다.

한 · EU FTA는 우리 기업들에 분명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유럽연합이라는 특수한 시장 환경과 유럽의 수도 브뤼셀에서 진행되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로비전쟁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유럽이라는 거대한 단일시장이 가져다 줄 무한한 잠재력은 반감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한 · EU FTA 시대를 맞아 보다 많은 우리 기업들이 브뤼셀을 거점으로 초거대 유럽시장 공략을 설계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박준우 < 주벨기에·EU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