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에게는 '세계 최고 부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재산만 400억달러(2009년 3월 말 현재)에 달한다. 그에게 붙은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는 또 있다. '세계 최고 기부왕'이다. 그와 가족이 설립한 재단인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자산은 302억달러.세계 최대 자선재단이다.

미국에서는 기업인들의 사회공헌 활동이 활발하다. 규모가 큰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로버트 존슨 재단 등은 모두 기업인들이 출연한 재단이다. 이들 재단은 해당 기업과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재단활동이 활발할수록 관련 기업의 성가와 이미지도 덩달아 올라간다. 기업인이 출연한 재단도 넓은 의미에서 기업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세계 1,2위 부자들이 출연한 자선재단

"기사에 오타가 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로타 바이러스란 듣도 보도 못한 병으로 아프리카에서 50만명의 아이가 죽은 게 사실이었다. 그것도 거의 매년 그래왔다. 질병 하나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도 사회가 무관심하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빌 게이츠)

세계 최대 자선재단인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이렇게 태어났다. 2000년이었다. 말라리아와 이질,새로 발견된 로타 바이러스에서 에이즈까지 각종 질병으로 저개발국 아이들이 매년 수백만명씩 죽어 나가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는 분노했다.

이후 게이츠와 가족이 재단에 출연한 돈은 277억달러.콜롬비아 등 세계 100여개국의 1년 국내총생산(GDP)보다 많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 3월 집계한 게이츠의 전 재산이 400억달러(약 48조원)임을 감안하면 번 돈의 절반 가까이를 출연한 셈이다. 덕분에 재단 자산 규모는2008년 말 현재 302억달러(약 36조원)로 불어났다.

게이츠 재단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건 2006년.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고 부자 1,2위를 다투어 온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전 재산의 85%를 기부하기로 하면서 기부 재산의 6분의 5를 게이츠 재단에 출연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버핏이 출연키로 한 주식의 시가는 310억달러로 게이츠 재단의 자산 총액보다 많았다. 함께 탁구를 칠 정도로 절친한 친구이자 세계 1,2위 부자들이 세계 최대 자선재단을 통해 다시 한번 손을 잡은 것이다.

버핏의 기부가 완료되면 게이츠 재단의 자산 규모는 600억달러를 넘게 된다. 70억명의 지구인에게 1인당 8달러50센트씩 나눠 줄 수 있는 돈이다.

◆이번 세기 안에 출연금을 다 소모한다

세계 1,2위 부자가 출연한 게이츠 재단은 다른 자선재단과는 몇 가지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선은 이번 세기 안에 모든 자산을 다 쓰고 해산키로 했다. 게이츠와 부인이 사망한 이후 50년 내에 해산하는 것이 목표다. 자산을 굴려 얻은 수익만을 사회공헌 활동에 투입하는 다른 재단과는 다르다. 그만큼 사회공헌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고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는 생각이다.

이에 따라 게이츠 재단이 지출하는 돈은 엄청나다. 작년 28억달러를 지출하는 등 설립 이후 9년 동안 205억달러를 썼다. 경제위기로 자산이 축소된 올해도 38억달러를 사용할 예정이다. 버핏이 게이츠 재단을 선택한 것도 '재단의 재산이 아닌,자선활동을 늘리는 재단'이란 점을 높이 평가해서다. 버핏은 자신이 기부한 돈의 105% 이상을 매년 자선활동에 사용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저개발국에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재단과는 차별화된 점이다. 게이츠 재단은 △저개발국 의료 지원 △저개발국 개발 사업 △미국 내 교육 지원 등 크게 세 가지 사업에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 에이즈 등의 백신을 개발하고 효율적으로 배포하는 데만 100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작년 지출액 28억달러 중 18억달러를 의료 지원에 썼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연간 예산 규모와 맞먹는다. 몽골 토고 짐바브웨 등 저개발국의 인프라 개선을 위해 이들 나라의 GDP를 능가하는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효과도 좋다. 잠비아 등에선 말라리아 발병률이 몇 년 새 80%가량 떨어졌다. 지난 9년간 홍역으로 인한 세계 사망자 수도 74%나 줄었다. 흑열병(인도의 풍토병) 치료제와 저가 경구용 콜레라 백신도 만들었다. 에이즈를 포함한 성병 방지를 위한 젤 타입의 미생물 살균제도 개발하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게이츠 재단은 에이즈 백신 개발을 위해 지난 9년 동안 3억3800만달러를 투자했다. 아직 성과가 없지만 투자를 계속하기로 했다.

◆재단이 활발할수록 기업 이미지 좋아져

게이츠는 작년 MS의 비상근 회장으로 내려 앉았다. 사실상 MS 경영에서 거의 손을 뗐다.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게이츠는 요즘 재단으로 들어온 각종 제안을 일일이 검토하고 직접 결정한다. MS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부문 사장이었던 제프 레이크스를 재단 CEO로 영입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MS의 간판은 여전히 빌 게이츠다. 그가 하는 일은 원하지 않더라도 MS와 연결된다. 그가 재단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할수록 MS의 이미지는 좋아진다. MS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저절로 만들어진다.

다른 재단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사회 풍토상 기업보다는 기업인이 출연한 재단이 주류를 이룬다. 게이츠 재단에 이어 자산 규모 2위인 포드 재단도 포드자동차 설립자인 헨리 포드의 아들이 만들었다. 로버트 존슨 재단도 존슨앤드존슨 설립자의 아들인 로버트 존슨이 설립했다. 인텔의 설립자인 고든 무어 부부는 고든&베티 무어라는 재단을 만들어 미국 내 10위 규모의 재단으로 키웠다.

이러다 보니 이들 재단의 활동은 기업의 이미지와 고스란히 오버랩된다. 이들 기업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선방한 것은 이런 좋은 이미지가 한 요인이 됐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기업인이 만든 재단도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