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유저리(usury)를 고리대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원래 원금 이외의 것을 받는 일체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서 단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돌려받는다면 유저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스토아적 청빈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서양의 중세에서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저리를 중대한 범죄로 간주해 엄하게 처벌했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 이르러 이자를 경제적 효용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금전대출이 상품의 제조와 유통을 위한 생산적 자본으로 사용된다면 사회공동체를 위해서도 이익이 되며,이 경우 이자는 돈이 있는 자와 돈이 필요한 자를 효율적으로 연결해주는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는 쉽게 용인받지 못했다. 자본주의적 경제가 태동하기 시작한 16세기 영국에서도 법률이 일부 허용에서 전면금지 사이를 오가는 등 혼란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논란의 와중에 사회적으로 가장 먼저 이자를 용인받은 곳은 빈민은행이었다. 15세기부터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빈민은행이 설립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빈민에게는 무이자 대출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지역에 따라 이자율이 연 30~5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빈민은행의 존재 이유는 첫째 자선에 의지해 생계를 영위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융자를 통해 경제력을 되찾게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권위에 부합되며,둘째 이자수입을 재원으로 해 빈민구제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도 공적 금융에 이자를 적용한 예가 있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빈민층을 보호하는 여러 제도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국천왕 때 시작된 진대(賑貸)가 대표적이었다. 이 제도는 의창,환곡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으나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존속됐는데 춘궁기에 양식이 떨어진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기에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제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일정 비율의 이자가 적용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10%의 이자가 일반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20%의 이율이 붙었다.

이는 빌려준 곡식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다 쥐나 새,습기 등으로 창고 안의 곡식이 줄어들게 마련이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설립한 그라민은행이 성공을 거두면서 마이크로 크레디트,즉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무담보 소액 대출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몇몇 민간단체가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울시가 희망드림뱅크 사업을 시작하는 등 지자체들의 참여도 줄을 잇고 있다. 더구나 연말께 정부가 주도하는 미소금융이 본격화되면 저신용자라도 사업계획에 따라 최고 1억원을 무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자의 역사성과 사업의 필요성에 비춰 제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자율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2~4%이고,미소금융은 5%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대출심사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무담보대출이므로 100%의 회수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자율이 너무 낮으면 재원 자체가 줄어들어 궁극적으로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다. 반대로 이자가 너무 높으면 사업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수익을 좇는 외부 자본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에 이미 각종 사모펀드가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 비춰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적정 이자율과 이자수입의 사용처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할 때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