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를 잘 그리는 겸재는 나이 80을 넘어 필법이 더욱 신묘해졌다.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지 오륙십년이나 돼서 그림을 여러 집에서 소장하고 있다. ' 형조판서를 지낸 18세기 문신 박준원의 글에서 보듯 겸재 정선(1676~1759)은 젊어서부터 이름을 날렸다. 그의 30년 지기였던 문인화가 조영석도 "재상에서부터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겸재를 모르는 이가 없고,작은 그림 한 폭을 얻어도 큰 옥을 얻은 듯 집안에 전해 줄 보배로 삼았다"고 했다.

조선의 문화는17~18세기에 절정을 이룬다. 그림에선 중국풍을 모방하던 데서 벗어나 우리의 산하(山河)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등장했다. 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겸재다. 그는 산세와 계곡의 형태를 직접 사생(寫生)한 후 그 아름다움을 독자적 형식으로 표현했다. 우거진 수풀은 묵법(墨法) 위주로,절벽은 선묘법(線描法)으로 그려 음양의 조화를 찾는 등 주역의 원리를 도입하기도 했다.

겸재가 대성한 것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끊임없는 노력 덕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금강산과 관동의 명승,서울 근교와 남한강 등을 찾아다니며 그리고 또 그렸다. 조영석은 "겸재가 전국을 여행하고 사생하면서 사용한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룬다"고 말했을 정도다. 말년에는 안경을 두 개씩 겹쳐 쓰고 붓을 잡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작품 값도 비쌌다. 18세기 실학자 황윤석은 ' 이재난고'라는 일기에서 정선의 그림 값이 3000전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쌀 한 되가 1전4푼이었다니 만만찮은 가격이다. 그의 그림은 중국에서도 비싼 값에 팔려 중국 역관들이 귀국할 때 겸재 집 앞에 줄을 서서 그림을 사갔다고 한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겸재 정선,붓으로 펼친 천지조화'전(11월22일까지 · 무료 관람)은 그의 그림 변화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전시회다. 36세부터 82세까지 작품 30건 140여점이 나와 있다. 그 중에 공조판서를 지낸 이광적의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아 북악과 인왕산 기슭에 살던 노인들의 장수축하 모임을 묘사한 '북원수회도첩'은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14점의 금강산 그림으로 이뤄진 '신묘년풍악도첩'은 초기 진경산수화풍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좋은 그림에는 당대의 미(美)의식과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런 저런 풍습도 엿볼 수 있다. 이 가을 겸재가 펼쳐낸 독창적 미의 세계에 푹 빠져 보면 어떨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