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자의 代母 김현남 수녀 "나눔이 좋아요"
흙 묻은 수녀복에 트럭 몰며 8년간 보살펴

`거지수녀' `왈패수녀' `겨울 빨래 수녀'
서울성가소비녀회 소속 김현남(67)수녀는 여럿 별명을 갖고 있다.

기자와 만난 김 수녀는 "나는 뭐든 나눠갖는 게 좋아요.

기쁨도, 슬픔도, 웃음소리도"라며 깜짝 놀랄 정도로 호방하게 웃었다.

지난 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청주교도소와 청주여자교도소를 제집마냥 드나든 그는 열정을 다한 보살핌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수형자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대모(代母)'가 된 지 오래됐다.

155㎝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에 항상 흙 묻은 수녀복과 검은 장화 차림의 김 수녀가 옥수수, 수박, 삶은계란 등이 실린 트럭을 직접 몰고 교도소를 찾아오는 모습을 기억하는 수형자와 교도관은 이제 한둘이 아니다.

정형숙 화성직업훈련교도소 사회복귀 과장은 "청주여자교도소 근무 시절 한여름에 수녀님을 뵈러갔는데 수형자들 준다고 땡볕에서 옥수수를 따고 계셨다"며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수녀님 웃옷을 쥐어짜면 땀 한 바가지가 나올 정도였다"고 자신의 목격담을 전했다.

정 과장은 "한번은 설을 앞두고 찾아갔더니 추운 마당에서 장작으로 불을 피워 조청을 만들고 계셨다"며 "수녀님이 삼일 밤낮으로 고생하신 덕에 전체 수형자들이 처음으로 떡을 조청에 찍어 먹으며 어머니 생각에 젖어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자는 `거지수녀'라는 별명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다.

별명 탄생 배경은 의외로 단순했다.

김 수녀가 자원봉사자들과 며칠 동안 남의 밭에서 무청을 뽑아 커튼처럼 엮어 교도소에 가져다주면 수형자들의 밥상에는 시래깃국이 올랐고 빵 공장에서 빵을, 시장에선 생선을, 농장에서는 과일을 얻어와 교도소로 날랐다는 것.
교도소에서 먹다 남은 밥으로 개를 키워 팔고, 배추농사와 고추농사를 지어 번 돈은 모두 무연고 수형자의 영치금과 치료비로 쓰였다.

교도소 강당의 소형 텔레비전이 답답했던 김 수녀는 알음알음으로 1996년 당시 이관진 한국 샤프 회장을 찾아갔다.

김 수녀는 거두절미하고 "샤프가 액정으로 유명한데 교도소 좀 도와주소"라고 말해 프로젝터 한 대를 얻어 남자교도소에 설치했고, 이듬해에 다시 찾아가 이번엔 여자교도소에, 3년째에는 소년원에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이런 나눔을 알게된 이 회장은 "거지수녀 또 왔소?"라고 말하면서도 김 수녀가 몰고다닐 트럭도 사 주고 `출소자의 집'을 짓는 데 5천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산상 여유가 없는 교도소는 2천만원 상당의 강당 의자든, 수백만원어치의 밥상이든 꼭 필요한 게 있으면 김 수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수완 좋은 김 수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김 수녀는 "수녀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거는 하고, 돈 있는 사람한테 돈도 좀 내놓으라고 하는 거지요"라며 "신기하게도 돈이 필요할 때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나타난단 말이에요"라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예컨대 무기수가 틀니를 하려는데 그 사람이 교도소에서 평생 벌어 모은 돈 100만원이 몽땅 든다고 해서 마음을 쓰고 있으면 지인이 오랜만에 `뭐 도와드릴 일 없나요'라고 안부전화를 걸어오고, "돈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주고 해서 틀니를 해줬다는 그런 식이다.

김 수녀는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7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나 수녀의 길을 선택했다.

작은 여종이라는 뜻의 `소비녀(小婢女)회'에 들어가 평생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머물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1988년부터 목요일마다 수형자들의 회개를 위해 밤샘기도를 올렸고, 7년째인 1995년 직접 교도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수녀회의 허락을 얻어 청주로 내려갔다.

김 수녀는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에요.

돈이 없어 가난하고, 마음이 가난하고…"라며 "수녀가 가난한 이들 곁에 다가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 폭력배 출신의 수형자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섰고,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소위 문제수(囚)에게는 따끔하게 야단도 치는 `왈패수녀'로도 유명하다.

한 번은 과수원에서 포도를 한 트럭 얻었는데 교도소 측이 술 만드는 데 이용될 수 있다며 포도반입을 제지하자 "내가 책임지겠다"고 우겨 수형자들에게 포도를 실컷 먹였다고 한다.

수형자들은 싱싱한 포도 맛에 감동했고, 농장에서 포도를 따느라 흙먼지로 뒤덮인 김 수녀의 하얀 운동화를 보고선 다시 한 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에도 이런 기질이 가감없이 발휘됐다.

수녀회로부터 4억원을 지원받아 청주에 `출소자의 집'을 지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뒤늦게 출소자 숙소인 점을 알고 문을 못 열게 하려고 몰려온 적이 있었다.

김 수녀는 "고추 농사짓는 거 비싼 값으로 서울에 다 팔아주고, 몸 아픈 분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무료로 보내드리겠다.

이렇게 하는데도 반대하면 교도소 재소자들을 다 풀어버리겠다"고 왈패 같은 모습을 보인 끝에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김 수녀 스스로도 "내겐 불도저 같은 면이 있어요"라고 말하며 천진하게 웃는다.

또 다른 별명 `겨울빨래 수녀'는 신부들 사이에 `저 수녀한테 한 번 걸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청주교도소 후원회원을 2천명으로 늘린 김 수녀는 후원금 1억원이 모이면 이자로 수형자들에게 간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보고 7천300만원까지 모았다.

이러다 1998년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대안학교인 양업고등학교를 설립하자 "컴퓨터와 책상을 사라"며 모았던 돈 중에서 7천만원을 뚝 잘라 내놓았다.

김 수녀는 함께 일하던 신부에게 "돈이야 또 모으면 될테고, 애들이 좋은 시설에서 교육받아 소년원에 안 들어오면 그게 더 남는 장사"라고 했다.

출소 후 갈 곳 없는 50대 정신지체 장애인과 할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살고, 다른 출소자들에게도 기반을 잡을 때까지 숙식을 제공한 그는 수형자들의 진정한 어머니였다.

2002년 청주 생활을 마치고 서울 송파구의 구립유치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3년 만에 정년퇴직했지만 수형자들을 향한 애잔한 마음은 여전하다.

지난해 66세의 나이에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딴 그는 노인학교와 성당은 물론 화성직업훈련교도소 등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웃음 선물에 나섰다.

김 수녀는 "웃어 넘긴다는 말이 있잖아요.

항상 웃는 연습을 하다보면 옹졸한 마음도 어느 순간 스케일이 커져요"라며 웃음 예찬론을 폈다.

그냥 웃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어디서든 통화하는 것처럼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호탕하게 웃는 연습을 매일 해보라고 조언한다.

수형자들을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잘 못 된 길을 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김 수녀에게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국 수형자들에게 속 시원하게 웃을 기회를 안겨주는 게 마지막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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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nanum@yna.co.krnoano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