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면도구,식품,화장지 등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쓰는 '일용소비재' 시장은 경기침체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었다. "아무리 주머니가 가벼워졌다고 해도 세수를 안 하고 이빨을 안 닦을 수는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는 이런 인식과 딴판이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미국 유럽 중국 브라질 등에서 2만여명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일용소비재 시장이 오히려 불황의 영향을 훨씬 더 민감하게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소용량보다는 한꺼번에 많은 제품을 사들이는 대용량 소비가 크게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 부류의 소비자

BCG는 불경기를 맞으면 재정 상태에 따라 소비자들의 소비행태가 제각각으로 변한다고 지적했다. 이 회사는 실업과 소득 감소로 불경기의 직격탄을 맞은 '돈 세는 사람',당장 현금 융통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미래의 재무 상태를 걱정하는 '초조한 절약가',불경기에도 탄탄한 재정 상태를 유지하며 자산 가치 하락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차분한 기회주의자'로 소비자 유형을 나눴다.

미국 소비자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돈 세는 사람'은 개수나 무게당 가격보다 전체 가격에 신경 쓰기 때문에 소용량 제품을 선호한다. 이들은 절약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포기하거나 건강에 대한 위협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

'초조한 절약가'는 미국 소비자의 약 60%를 차지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절약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다양한 상점을 다니며 물건값을 비교해 할인점에서 대용량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지만 건강,품질,맛 등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차분한 기회주의자'는 여전히 많은 돈을 쓴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일부 상품군으로 추가 지출 항목을 제한한다.

◆필수품 소비,PL로 전환

불요불급한 기호품 성격을 띤 제품일수록 경기침체에 따른 매출 타격이 심했다. BCG는 일용소비재를 아침식사용 시리얼,비누 등과 같은 '필수품'과 즉석식품,유기농 야채와 같은 '고부가가치 상품',아이스크림,초콜릿 등의 '기호품'으로 구분했다. "구매를 줄이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품목은 기호품(30%)이었으며 고부가가치 상품(25%)과 필수품(20%)이 뒤를 이었다.

소비자들의 구매패턴은 세 제품군 모두에서 크게 변했다. 필수품은 할인점이 자체 브랜드를 달아 내놓은 'PL제품'으로의 이동 현상이 뚜렷했다. 이동하는 폭만큼 필수품 제조업체들은 자신들의 고객들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BCG 관계자는 "유통업체에 PL제품을 납품하는 기업일수록 경기침체로 인한 피해를 덜 입었다"며 "PL제품의 품질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만큼 경기침체 이후에도 PL제품 열풍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고부가가치 상품은 세일 기간에 집중적으로 구매가 이뤄졌다.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덤으로 한 개를 더 주거나 추가 할인이 이뤄지는 제품을 선택하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브랜드 파워가 힘을 발휘하는 곳은 기호품 시장이었다. '차분한 기회주의자'들이 자신의 기호에 맞는 특정 상품에 한해서만 지출하려는 성향을 보이면서 브랜드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건강이나 웰빙과 관련된 제품의 지위가 견고했다.

식재료나 소스 등 일부 품목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식을 포기하는 대신 가정에서 '레스토랑급' 음식을 즐기려는 소비자들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꺼번에 많이 산다

불경기 이전에는 용량을 줄인 소포장 제품이 잘 팔렸다. 식구의 숫자가 적거나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소비자들이 주로 소포장 제품을 찾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돈 세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소비계층이 대용량 제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09년 첫 2개월간의 생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가량 줄었다.

쇼핑 장소와 빈도 등도 바뀌고 있다. 우선 소비자들의 유통 채널 갈아타기가 한층 빈번해졌다. 손님을 많이 끌어모은 유통채널은 온라인 슈퍼마켓,회원제 할인점 등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꺼번에 물건을 많이 사 놓으려는 성향이 강해졌으며 가격만 좋으면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유통채널로 이동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소비자들도 부쩍 늘어났다.

김용범 BCG 서울사무소 파트너는 "불황기 일용소비재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품 브랜드를 알리는 전통적인 마케팅만으로 부족하다"며 "물건을 공급하는 유통업체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포장 방식 등에도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