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변방의 말들 : 독거노인과 홀로노인은 경쟁관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의 60세 이상 노인 2417명을 표본으로 조사한 '노인생활 실태조사'에 따르면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사는 독거노인은 전체의 11.9%,자녀와 따로 사는 부부 노인은 29.1%로 전체 노인 인구의 41%가 독립가구로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 1월15일 한 신문이 보도한 이 기사에는 지금은 제법 많이 쓰이는 '독거노인'이란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말은 그리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종합뉴스DB인 '카인즈'를 통해 보면 1990년 이후 '독거노인'이 단어로 쓰인 첫 기사는 1994년 3월16일 H신문으로 나타난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게 '동거'이듯이 '혼자 삶 또는 혼자 지냄'이란 뜻의 '독거'는 원래 있던 말이다.

이 말이 다른 한자어 명사 '노인'과 결합해 '독거노인'을 이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독거노인은 이후 고령화 사회의 진행과 핵가족 가속화가 맞물리면서 급속히 늘어나 표준국어대사전(1998년)에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인'으로 풀이돼 올랐다.

하지만 '독거노인'이 단어로서의 지위는 얻었지만 '독거(獨居)'라는 한자말 자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게 아니다 보니 곧바로 순화의 대상에 올랐다.

그래서 나온 게 '홀로 사는 노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문제를 담고 있었다.

독거노인을 순화한 말 '홀로 사는 노인'은 단어가 아니라 구이기 때문에 독거노인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말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다.

'독거노인'이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년이 지난 2005년 이후 '홀로노인'이 간간이 쓰이기 시작했다.

애초의 '홀로 사는 노인'에서 가운데 수식어를 없애고 합성어처럼 만든 말이 탄생한 것이다.

이 말은 요즘 제법 많이 쓰이는 추세이다.

'홀로노인'은 의미적으로나 형태적으로 독거노인을 대체할 만한 단어로서의 모습을 갖췄으나 여기에도 우리말 조어법과 관련한 논란이 남아 있다.

논란의 요지는 '홀로'는 부사인데 어떻게 명사를 직접 수식하는 꼴로 결합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독거노인'은 단어로서의 지위를 얻은 지 오래 됐지만 이의 또 다른 형태인 '홀로노인'은 아직 단어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독거노인이 아직은 기득권의 프리미엄을 누리곤 있지만 언제 '떠오르는 신진'인 홀로노인에게 자리를 내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언중이다.

언중의 눈길이 어느 쪽으로 자꾸 가느냐에 따라 말의 세력판도가 결정될 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몰래카메라'가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해 단어로서의 지위를 얻은 것처럼 똑같은 '부사+명사' 구성인 '홀로노인'이 단어로 대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요즘엔 '여유만만'이란 말도 자연스레 쓰지만 여기에도 그 태생과 관련한 언중의 선택 문제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여유만만'이란 단어는 원래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여유작작'(餘裕綽綽 : 말이나 행동이 너그럽고 침착하다)이란 말을 썼다.

또 '야심만만'(野心滿滿 : 무엇을 이뤄보겠다는 욕망이나 소망이 마음 속에 가득하다)이란 단어가 원래 있었다.

아마도 '여유만만'은 본래의 말 '여유작작'을 비틀고 또 다른 말 '야심만만'을 흉내 내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음 속에 야심이 가득한 게 '야심만만'이니,마음 속에 여유가 많은 것을 '여유만만'이라 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더구나 언중 사이에 '여유만만'이 급속히 세력을 얻자 1998년 나온 <연세한국어사전>에선 '여유만만하다'를 정식 단어로 올렸다.

<연세한국어사전>이 다른 사전들에 앞서 이미 10여 년 전에 이 말을 단어로 처리한 것은 비교적 구어체 말을 많이 수용한 사전 편찬방침의 결과이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터넷판에서도 아직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말이 단어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혔다고는 볼 수 없다.

'기대만발'(기대가 많이 일어남)도 말을 비틀어 쓰기 좋아하는 인터넷 세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백화만발'(百花滿發 :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활짝 핌)은 있어도 '기대만발'이란 말은 없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 말도 자연스럽게 쓰이게 됐다.

그 반대 뜻으로 '기대난망(기대하기 어려움)'이란 말도 쓰인다.

'여유만만'이 일부 사전에 이미 단어로 올랐고,'기대만발'이나 '기대난망'은 신문 방송 등 제도권 언어로의 진입을 예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단어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갖췄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