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회사의 영업 담당 중역인 A씨는 요즘도 억울한 심경에 몸서리를 칠 때가 많다. 2005년 미국 정부가 D램 가격 담합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했을 때의 악몽 때문이다. 그 일로 회사는 수억달러의 벌금을 물고 자신은 현지 교도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출소 후 회사 업무에 복귀했지만 '대인 기피증'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미국 법무부로부터 카르텔 구축 혐의를 받은 LG디스플레이도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미국 현지 임원들은 이미 투옥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회사는 4억달러의 과징금을 맞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재무 담당 임원들은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해외 기업들의 특허 침해 소송으로 밤잠을 자주 설친다. 스마트폰,LED TV 등 한국의 신형 '수출 병기'들이 해외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가자 타이푼 터치 테크놀로지,티세라LLC 등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특허 전문회사들이 잇따라 소송을 제기하고 있어서다.

카르텔(담합) 규제,특허소송,콘텐츠 부실이 한국 기업의 글로벌 약진을 가로막는 3대 '리걸 트랩(Legal Trap)'으로 부상하고 있다.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을 휘젓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예기치 않은 덫에 걸려 신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의 강도 높은 카르텔 규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2005년 이후 미국으로부터 과징금 제재를 받은 규모만 1조6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 정부가 미국 퀄컴사에 부과한 금액(2600억원)의 6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패권을 급속히 장악해 들어가고 있는 데 따른 해외 경쟁 당국 및 기업들의 견제심리가 작동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실제 간판 기업들인 삼성전자(3억150만달러) 하이닉스반도체(1억8600만달러) 대한항공(3억달러) LG디스플레이(4억달러) 등이 돌아가면서 수천억원의 과징금을 두들겨 맞고 있다. 이들 4개사는 미국 역대 과징금 상위 10개사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카르텔 규제라는 '보이지 않는 무역장벽'을 활용해 한국 기업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미국에 이어 EU와 일본 당국으로부터도 같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대한항공도 EU 반독점기구인 유럽경쟁위원회(EC)로부터 조사받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전 세계의 무역장벽은 속속 무너지고 있지만 자국의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는 해외 기업들을 감시하는 감독당국의 눈길은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