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말,삼성은 베트남 하노이법인을 최우수 해외 사업장으로 선정했다. 미수교 상태였던 당시의 베트남에서 사람들이 '남쭈띠엔(남조선-당시 공산 베트남 정부는 한국을 이렇게 호칭했다)'은 몰라도 'SAMSUNG'은 가장 인지도 높은 브랜드로 통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이 나라의 흑백TV 시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은 점유율이 90%를 넘는 압도적 지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류층에 보급되기 시작하던 컬러TV 시장은 일본의 JVC가 싹쓸이했다. 당시 일본 가전회사들은 흑백TV 생산을 중단한 상태였고,베트남 가전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던 미쓰비시상사에서 흑백TV를 대줄 '대타'로 삼성전자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때의 삼성은 일본 기업들과 견줄 TV 기술력도,독자적인 마케팅 실력도 부족했다.

1996년 여름 뉴욕특파원으로 부임,자동차와 가전제품 쇼핑에 나선 필자에게 '메이드 인 코리아'는 1류 품목 리스트 밖에 있었다. TV는 '소니 천하'였고 대당 2만달러 안팎의 중형차 부문은 도요타의 캠리와 혼다 어코드,닛산 맥시마가 현대 쏘나타보다 앞서 있었다. 4만달러를 넘는 럭셔리 카 부문에서 독일 벤츠와 자웅을 겨루던 도요타 렉서스와 혼다의 애큐라는 넘보기 힘든 산이었다.

지난주 절정을 이룬 주요 기업들의 2분기 실적 발표는 증권시장에 '어닝 서프라이즈'를 안겨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득해보였던 '글로벌 1위' 기록을 곳곳에서 쏟아냈다. 올초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가 럭셔리 카 부문에서 벤츠와 렉서스,BMW 등을 제치고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는 뉴스는 한국인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의 빛을 쏘아준 신호탄이었다.

'TV=소니'로 통하던 글로벌 공식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보기 좋게 깨뜨리며 소니를 3위로 끌어내렸다. 노키아의 휴대폰 아성도 삼성과 LG의 합계 글로벌 점유율이 30%를 넘어서면서 한 자릿수 이내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연이어 들려오는 선전(善戰)의 비결은 뭘까. 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장에서는 순간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분명한 성과목표(아젠다)를 세워야 하고,아젠다를 달성하기 위해 좌고우면할 틈이 없이 정진해야 한다. 경영자에게 '해결사'형 자기책임주의(영어로 표현하면 I'll do it)는 필수다. 신상품 · 신기술 개발이 됐건,점유율 제고가 됐건 한번 목표를 정하면 밀어붙이는 힘이 여기에서 나온다.

정부와 정치권이 배워야 할 게 이것이다. 요즘 정부와 정가에서는 '~때문에'라는 말이 들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경제 체질 개선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고용유연성을 높여야 하는데 '야당과 노조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고,성장 탄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늘려줘야 하는데 '투자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식이다.

누군가 핵심 난제를 풀어줘야 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건 의타(依他)형 책임전가(영어로 하면 Let somebody do it)다. 기업들이 이런 면피주의에 빠져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과는커녕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고용유연성을 높이겠다면 야당과 노조를 어떻게든 설득하거나 정면돌파해야 하고,기업 투자가 아쉽다면 그런 환경을 보다 진지하게 조성하는 게 행정과 정치의 할 일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기업들로부터 제대로 배울 것을 권고한다.

이학영 부국장겸 산업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