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갑작스럽게 체면치레할 자리에 갈 일이 생겨 퇴근 후 동네 단골 이발소를 찾아갔다. 불행히도 '금일 휴일'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그래도 이발은 해야 될 것 같아 집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근처 이발소를 몇 군데 돌아다녔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아마도 같은 구역에 있는 이발소들이 모두 쉬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는데,집사람이 이왕 나온 김에 시(市) 경계를 넘어서 가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다 됐다. 하남 시내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어 그 입구를 살펴보니 조그마한 이발소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나이 지긋한 이발사가 혼자서 손님 머리를 염색해 주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라"는 그의 말에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영락없는 시골 이발소 모습이다. 낡은 의자와 가구,정리 안 된 화분,엉성한 세면대….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왕 들어온 거 다시 나가기도 그렇고 해서 기다렸다.

내 순서가 돌아와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머리를 맡겼다. 그러나 이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이발사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계는 사용하지 않고 가위로만 머리를 깎는데 가위놀림,손놀림이 예술의 경지요 이발의 고수였다. 어디 그뿐이랴.이발이 끝난 후 얼굴 면도도 직접 하는데,피부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크림을 아주 조금 바른 후 능숙한 솜씨로 면도기를 다뤘다. 아주 잠깐 사이에 놀랄 정도로 깨끗이 정리된 얼굴 피부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머리 모양도 아주 정갈하고 단정했다. 50년 솜씨라고 했다. 요금도 저렴했다. 지금까지 깎아 본 머리 모양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기성 양복과 일류 수제 맞춤 양복의 차이라 할까.

요사이 서점에 가 보면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누구 누구와 잘 지내는 법 등 뭐 그렇고 그런 엉성한 책들이 출판되고 또 팔려 나간다. 기본에 충실하기보다는 임기응변과 같은 잔기술 사용법을 가르치는 책들이다. 어디 인간 관계만 그런가. 학문도 운동도 세상사 모두가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잔기술을 아무리 배워도 잠깐은 그럴 듯할지언정 궁극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 조급히 이루고 가지려고 하는 마음에 정성과 내공이 쌓인 참된 기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원시하는 것은 아닌지.빠른 것,편하고 쉬운 것만이 선(善)이 되는 요즘 같은 세상.혹시나 나 자신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느낌이 들 땐 그 이발소를 다시 찾아가 머리를 깎아 볼 요량이다. 이발의 고수,아니 기본기의 진정한 의미를 보고 또 느끼기 위해….

손영기 GS파워사장 ykson@gspow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