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인문학 산책] 도스토예프스키 “인간은 이익만 좇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불완전하지만 존엄하다. 그 존엄성 안에서만 평등하며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결국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다."

위대한 시인,소설가,극작가는 하나같이 인간의 속내를 읽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문학이란 것이 원래 사람에 관한,사람을 위한,사람에 의한 이야기이니 그런가 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마치 내시경처럼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쳐 보여 준다.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의 본질을 콕 짚어 읽어 낸다.

문학이 제공하는 '사람 읽기'는 단순한 독서의 즐거움을 뛰어넘어 매우 '실용적인' 체험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직업도 인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인간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작게는 생존 차원에서부터 크게는 리더십 단계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대문호들 중에서도 특히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을 읽고 사회를 읽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간 심연을 꿰뚫어 보는 사람' 혹은 '영혼의 선견자'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이 영혼의 선견자가 바라본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인간의 마음 저 어두운 심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의 사람 읽기는 대충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소설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며 불합리한 존재라고 못박는다.

인간은 조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조화를 파괴하고,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며,때로는 고통 속에서 기쁨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인류의 전 역사는 인간 비합리성의 기록에 다름 아니며 인간은 합리성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때는 고의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과 이성에 반대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2X2=4'라고 하는 수학적 공식을 여러 번 언급한다.

'2X2=4'는 불변하는 법칙이지만 인간의 변덕은 때로 법칙마저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내 생각에 '2X2=4'는 매우 훌륭하다. 그렇지만 '2X2=5' 역시 매우 매력적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세월이 꽤 흘렀건만 여전히 흥미롭게 들린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냐 불합리한 존재냐 하는 것은 비단 19세기만의 논쟁거리는 아닌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합리성은 인간의 본질 중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익의 개념은 여전히 인간 행동의 제1 동기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쓰는 '경제'란 말만 해도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을 이성과 이익에 불복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각은 오히려 오늘날 더 참신하게 느껴진다.

둘째,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선과 악을 그 극한까지 탐구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주인공 드미트리는 한 인간 속에 '마돈나의 이상'과 '소돔의 이상'이 나란히 존재한다고 외친다.

신과 악마가 무한히 투쟁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는 완벽하게 선한 인간도 별로 없고 완벽하게 악한 인간도 별로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모든 것,모든 일,모든 사건을 언제나 정반대되는 두 가지 시각에서 동시에 고찰한다.

인물과 사건과 에피소드들은 선과 악을 축으로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한다.

셋째,인간에게는 의식과 더불어 '자의식'이 있다.

19세기 작가 중에 인간의 자의식을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명쾌하게 파헤친 작가도 드물다.

자의식이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상되는 타인의 반응에 방어적으로 대처한다.

예를 들어 보자.

《가난한 사람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주인공은 상대방이 묻지도 않는데 늘 자신의 상태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기도 돈이 꽤 있다는 둥,누추한 아파트에 세를 얻은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편리함 때문이라는 둥,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어떻게 해서든 보호하기 위해 그는 심리적인 방어벽을 친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돈의 부족에서 오는 궁핍함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타인과 자신의 비교에서 오는 좌절감이다.

인간은 참으로 복잡한 존재다.

자기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동시에 언제나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보려고 한다.

자의식은 인간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읽어 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따지는 인간의 모습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

인간은 때때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불합리한 선택을 하고,선과 악의 중간 지대에서 무섭게 고뇌하며,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 괴상한 존재는 어떤 법칙이나 정의에 의해 획일적인 단위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 읽기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다 불완전한 동시에 누구나 다 존엄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인간은 그 모든 변덕과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존엄하다는 것,인간은 오로지 그 존엄성 안에서만 평등하다는 것,그리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사람 읽기와 휴머니즘,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로 합쳐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