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년부터 허용 방침­… “불공정한 게임” 반론도

[Focus] '독약' 풀어 기업 경영권 '사냥' 막는다
동물의 세계는 '먹느냐,먹히느냐'라는 생존의 법칙이 지배한다.

힘이 약하거나 약점을 보이면 더 강한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게 마련이다.

이 같은 법칙은 기업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업 확장을 위해 다른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 · 합병(M&A)하는 쪽과 인수당하지 않으려는 쪽이 늘 존재한다.

'먹으려는 기업'(공격기업)과 '먹잇감이 되는 기업'(방어기업)의 싸움은 때때로 동물 세계 이상으로 치열하다.

그런데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에 주어진 무기가 서로 다르다면 어떨까.

불공정한 게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내년에 도입하기로 한 포이즌 필(Poison Pill · 독약처방)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이다.

국내 기업들이 외부로부터 M&A 공격을 받을 때 취할 수 있는 마땅한 방어수단이 없다는 점 때문에 정부는 이 제도를 도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포이즌 필'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정상적인 M&A 시도까지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게 반대 논리다.

⊙ 포이즌 필이란…

현재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다.

포이즌 필의 원리는 이렇다.

A기업이 B기업을 인수하려 할 경우 B기업이 신주(新株)를 발행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 또는 무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예컨대 B기업의 총 발행주식 수가 100주이고 대주주 지분율이 30%(30주)인 상황에서 지분 29%(29주)를 확보한 A기업이 B기업을 인수하려고 시도한다고 가정해보자.

A기업과 B기업 대주주 외에 다른 주주들은 중립을 지킨다고 할 때,A기업은 B기업 주식 2주만 추가로 사들이면 지분율이 31%(31주)가 돼 경영권을 빼앗을 수 있다.

이 때 B기업이 포이즌 필을 통해 신주 20주를 발행하고 기존 대주주에게 무상으로 전량 매입할 수 있게 한다면,B기업 대주주는 전체 발행주식 120주(기존주식 100주+신주 20주) 가운데 50주를 확보하게 돼 지분율이 41.7%로 높아진다.

반면 A기업의 지분율은 24.17%로 떨어진다.

A기업으로선 포이즌 필 도입으로 B기업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22주를 더 확보해야 한다.

B기업 인수에 들여야 할 비용이 포이즌 필이 없을 때와 비교해 급격히 늘어나게 돼 결국 경영권 인수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하는 셈이다.

⊙ 10년 논란 끝에 도입되나

[Focus] '독약' 풀어 기업 경영권 '사냥' 막는다
포이즌 필은 이처럼 경영권 방어에 유리한 수단이지만 정부는 상법상 '주주 평등의 원칙'을 들어 그동안 허용하지 않았다.

기존 주주에게만 주식을 싸게 매입할 권리를 주면 해당 회사 주식을 새로 사려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한발짝 더 나아가 정부는 IMF 외환위기를 전후해 외국자본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M&A 방어제도를 없애 버렸다.

이 같은 정부 방침에 대해 경제계는 경영권 보호를 위해선 서둘러 포이즌 필을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국내 기업에 대한 해외 기업이나 투기자본의 M&A 시도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정작 방어할 수단은 자사주 매입뿐이라는 게 경제계의 주장이다.

해외 투자를 유치한다는 목적도 좋지만 뾰족한 경영권 방어수단이 없는 상태에선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 앞에 '무장해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계는 또 경영권 방어수단이 부족하다보니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투자에 사용하지 않고 위기상황시 즉각 쓸 수 있도록 사내에 쌓아두는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법인이 투자에 쓴 돈은 2005년 36조2400억원에서 2007년 34조3000억원으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비상시에 대비해 사내에 쌓아둔 돈은 285조9000억원에서 355조6600억원으로 급증했다.

⊙ 도입시 부작용 우려도 커

그러나 포이즌 필 도입에 반대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부 시민단체는 포이즌 필이 외부로부터의 M&A를 어렵게 만들어,결국 M&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까지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C기업 대주주가 경영능력이 없어 주가가 폭락하고 있을 경우 경영을 더 잘할 수 있는 D기업이 C기업을 인수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그런데 C기업 대주주가 포이즌 필을 통해 D기업의 경영권 인수를 어렵게 한다면 결과적으로 C기업 주주들만 손해를 본다는 게 반대하는 쪽의 논리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포이즌 필을 도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M&A 시도를 어렵게 만든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대주주를 포함한 모든 기존주주에게 신주를 싸게 인수할 권리를 주기 때문에 M&A를 하려는 쪽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주주만 확보한다면 충분히 M&A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 정부가 생각하는 도입 방식은…

찬반양론이 맞선 상황에서 정부는 일단 경제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다만 도입절차를 포이즌 필을 이미 시행 중인 다른 나라들보다 까다롭게 정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 미국과 일본은 기업 이사회에서 결의하면 언제든지 포이즌 필을 도입할 수 있게 허용해주고 있다.

반면 정부는 이사회 결의가 아닌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통해 회사 정관을 고쳐야만 포이즌 필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주주총회 특별결의'란 회사의 중대 현안에 대해 주총에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찬성한 주주의 보유 주식 합계가 해당 회사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정부 방침에 대해 경제계는 사실상 도입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주총을 소집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얻기도 어렵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몇몇 중소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대기업들은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 수가 적어 포이즌 필 도입에 필요한 '출석주주 3분의 2 이상 찬성'이란 전제조건을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는 이 같은 기업들의 주장과 반대하는 쪽의 논리를 최대한 반영해 최종적인 포이즌 필 도입 방안을 올 연말께 확정하기로 했다.

포이즌 필이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실효성이 있으려면 선진국들처럼 이사회 결의만으로 도입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는 기업 논리가 어느 정도 반영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태명 한국경제신문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