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구자준 LIG손해보험 회장
"5월 2일.해발 4280m의 페리체로 가는 도중 2007년 에베레스트 '코리안 루트' 개척에 도전하다 눈사태로 세상을 떠난 오희준 이현조 두 대원의 추모비를 만났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두 대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원정만은 반드시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

"5월4일.해발 4900m의 로브제로 향한다. 통상 하루 400m 정도를 올라가지만 이 구간만큼은 700m씩 올라야 한다. 해발고도 5000m에 가까워지면서 두통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일행을 보며 힘을 더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등반 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구자준 LIG손해보험 회장(59)이다. 지난 4월27일~5월18일 박영석 대장과 함께 에베레스트 코리안 루트 개척에 성공할 때 기록한 글이다. 구 회장은 해발 5364m 베이스캠프까지 올랐다.

구 회장은 LG그룹 창업주 고(故)구인회 회장의 동생인 구철회 회장의 4남4녀 중 막내로 LIG손보의 오너다. 그런데 왜 이 같은 고생을 사서 할까. 오지탐험만이 아니다. 마라톤도 풀코스를 아홉 번이나 완주했다. "나라고 편하게 골프나 치고 싶지 않겠냐"라는 게 구 회장의 말이다.

구 회장이 탐험과 마라톤에 나선 것은 지천명(知天命)인 쉰 살이 되던 2000년이다. LG화재 부사장이던 그는 LG그룹 계열분리를 계기로 럭키생명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럭키생명은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부실화된 상황이었다.

"LG그룹에선 오너 집안으로 사실상 준공무원처럼 편하게 지냈다. 그러다 회사를 그룹에서 떼어내니 새로 세우는 것처럼 힘들었다. 당장 연봉이 5000만원이나 줄었고 사장 판공비가 한 달 50만원으로 골프 한번 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작한 게 마라톤이다"고 구 회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무기력했던 직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마라톤에 도전했다. 주말마다 100여명의 직원과 함께 뛴 뒤 설렁탕 한 그릇씩 나눠먹었다. 판공비 50만원뿐 아니라 개인 돈까지 썼다.

당시 럭키생명은 하루하루가 부도 위기였다. 구 회장은 "나는 공대 출신(한양대 전자공학과 졸업)으로 금성사 등 제조업체에서 26년간 일하다 갑자기 보험사로 왔기 때문에 당시 보고서를 봐도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며 "한계 돌파가 필요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때 박 대장이 히말라야 최고봉 중의 하나인 K2(8611m)를 함께 등정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LG화재 부사장 시절,오지탐험 등 비인기 문화 · 예술분야를 후원하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황당한 제안이었지만 구 회장은 정신이 버쩍 들었다. "회사를 살리려면 최고경영자(CEO)가 떠야 하는데 다른 CEO와 똑같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골프나 치고 그래선 차별화될 수 없다. 한계를 깨보자."

2001년 그는 박 대장과 함께 K2 등반길에 나섰다. 두 번째 베이스캠프가 있던 5500m까지 올랐다. 9박10일간 하루 12~13시간을 걸어올라간 뒤 텐트에서 '쪼그려잠'을 잤다. 몸무게가 8㎏ 줄었고 발톱이 두 개나 빠졌다. 일행 중 한 명은 고산증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때 구 회장은 한계를 이겨내는 1등 정신과 임파워먼트(empowerment · 권한 이양)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너무 너무 어렵더라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한 달을 비우고 다녀오니 회사도 더 좋아졌다. 임원들이 '내가 결정해야 하는구나'라는 책임의식을 느낀 때문이다. "

구 회장은 마라톤을 통해 보험사의 경영을 깨우쳤다. "보험은 마라톤과 같다. 오버페이스하면 오래 달리질 못하며 완주는 불가능하다. 추월하려면 시간도 걸린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럭키생명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신계약보험료가 137%나 증가했고 직원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연간 150억원 이상 흑자를 4~5년간 낸 뒤 2008년 초 우리금융지주에 매각했다. 현재 우리아비바생명이 럭키생명의 후신이다.

구 회장은 지금 LIG손보의 대표이사지만 한 달에 한 번가량의 임원회의와 이사회를 통해 주요 안건을 보고받는 정도만 챙긴다. 대부분의 업무는 김우진 사장이 책임경영을 한다. 한 달씩 회사를 비우고 에베레스트 등반을 다녀올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를 비운 한 달간 구 회장은 사색에 잠기고 큰 구상을 하며 '블루오션'을 찾는다.

그렇다고 모험이나 마라톤을 임직원에게 강권하진 않는다. 그야말로 솔선수범형이다. 사람들마다 스타일이 다른 것 아니냐는 게 구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구보와 조깅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구보는 안 뛰면 맞는 것이고,조깅은 즐기면서 스스로 뛰는 것이다. 직장도 즐거우면 천국이지만 가기 싫다면 지옥이다"라고 설명했다.

구 회장은 "LIG가 LG그룹의 장점은 이어받되 이기는 문화를 좀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LG그룹이 기업경영을 해오면서 절대 망하지 않는,강한 기업이 됐다고 자부하지만 공격적인 문화가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구 회장의 마라톤 경영에는 희망과 나눔의 철학도 내포돼 있다. 그는 2004년 9월 참가한 베를린마라톤 대회부터 자신이 달린 1m당 100원씩을 'LIG희망마라톤기금'으로 적립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고 있다. 산에 오를 때는 고도 1m당 1000원을 적립한다. 금액은 적어 보여도 지금까지 모은 돈만 4000만원에 이른다. 여기에 임직원들의 참여까지 더해 모두 45명의 교통사고 유자녀에게 1억원가량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