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연애를 꿈꾼다. 눈의 광채가 형형해지고 뱃살의 긴장감이 되살아나면서,낭만과 전율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연애 말이다. 한데,꿈꾼다는 것은 현실에서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두 번 만날 때는 운명 같지만,대화의 구멍이나 뜻밖의 개입으로 연애의 상황이 돌변하거나 지리멸렬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작가들의 조촐한 저녁 모임에서 '연적'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의 발단은 아일랜드의 희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의 편지 한 통이었는데,'피그말리온'이란 작품의 영감을 준 배우 스텔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하자 눈이 확 돌아간 쇼가 욕설과 저주에 가까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좋다,가거라.여자 하나 잃는 것이 세상의 끝은 아니니까"가 편지의 첫 문장이었다.

작가들은 사랑이 끝나가는 순간에 그렇게 적나라하게 질투와 혐오를 까뒤집어 보일 수 있는 쇼에 반한 듯했고,그 영향으로 슬슬 자신들의 연애가 실패한 이유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쇼의 경우처럼 새로 나타난 제3의 인물(사실 쇼에게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연적이냐를 따지면 아주 복잡해진다)은 강력한 연적이어서,작가 A는 '내 여자의 남자'때문에 연애가 끝장이 났다고 실토하는가 하면, 작가 B는 사람을 소개해줬다가 도로 낚아채간 오랜 친구가 연적이었고, 작가 C는 남편이 자신보다 딸에게 관심이 더 많다며 '내 딸과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연적이라 했다. 작가 D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자신이 연적이 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재미있는 것은 연적이 반드시 사람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 F의 연적은 '싱글'인데,남편들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데 상당수의 아파트 여자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눈초리라고 했다. 작가 G는 애인이 있을 것 같다며 주변에서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지 않는다며 '오해'가 연적이라고 했다. 작가 H는 글로 번 돈으로는 연애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돈'을,작가 I는 소설 속에서 연애하느라 실제 사랑을 못한다며 '소설'을 연적으로 꼽았다.

연적이 정치의 속성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자 연애와 정치 얘기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스텔라가 쇼에게 "당신은 깡패.당신은,당신은 무식한 사람"으로 시작하는 답장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동시에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과 정치가들의 파행이 커피처럼 등장했다. 우리는 국민들 사이에 분노와 증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쓴 커피를 '리필' 받았다. 와중에 뜬금없는 질문 하나가 터져 나왔다. 정치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나?

우리는 헷갈렸다.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을 위해서'라는 모토를 사용하며 싸운다. 그들은 국민의 연인인 양 외쳐대지만,국민이 정치가들의 연인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결국,정치인들은 '없는 애인'을 곁에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싸움의 목적은 사라지고 싸움 자체가 목적이 된 듯 보일 때도 있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연인없는 연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결국,작가들은 쇼의 신랄한 욕설에 매료되어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게 된 이유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쇼의 욕설 속에는 여인에 대한 진심이 들어 있었다. 정치인들도 진정 '국민을 위해서' 싸웠다면 욕설과 분노를 통해서 국민의 감동을 얻어냈을 것이다. 기댈 데 없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진정 국민이 정치인들의 애인이었다면,정치인들은 연적이 아니라 상심한 애인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