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엊그제까지 평온하게 일을 하던 가장,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다. 이런 참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해고 대란(大亂)'이 아니고 '해고 소란(小亂)'이라고 우기는 이상한 목소리마저 들린다. 부조리한 법 때문에 억울하게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 생겼는데,숫자의 적음을 핑계삼아 참으라고 하니 이런 비정한 경우가 어디 있는가. 정치란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라 했거늘,우는 사람이 소수 일거라 하여 방치하는 정당이 있다면 어떻게 약자를 위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총량불변의 법칙'이라는 해괴한 소리도 나온다. 어차피 비정규직이 해고되면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테니 비정규직 총량에는 변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숫자와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비인간화의 극치가 아닌가. 식당의 주인조차 자주 오던 고객이 눈에 띄지 않으면 시름에 잠기는 판이다. 엊그제까지 같이 일하던 사람 내보내고 새 사람 받으면 숫자가 같다고 하여 심사가 편할 것인가.

문제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데는 정부 여당의 책임이 크다. 그것도 이전 정부와 현 정부를 포함해서 말이다. 여기에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장의 직무유기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줄기차게 말해온 것이 '사회적 합의'다.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아 법안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란 좋은 말이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다는 게 문제다. 사막의 상인들은 신기루를 보고 신이 나 쫓아가지만 결국 허상임을 알게 되면서 죽음에 이른다. 그런 허무함을 우리는 이번 비정규직법 사태는 물론 말싸움으로 끝난 지난번 미디어법의 경우에서도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적 합의'의 핵심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모두가 십인십색인 다원주의사회에서 어떻게 만장일치가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존 롤스와 같은 학자는 아예 '무지(無知)의 베일'을 쓰고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떠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사회적 입장을 떠나라는 것도 그렇다. 현실적으로 엄연히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고 또 기업의 재정능력에 한계가 있는데,그런 현실을 못 본다면 몽상가일 뿐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대표자들을 가지고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번에 국회가 노동계 대표를 부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 과연 비정규직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인가. 이들은 정규직을 대변할 뿐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집단은 아니다.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대표자들을 불러 모아 사회적 합의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하면서 비장애인 대표를 부른 것과 같다.

또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서 어차피 대표자를 부른 것이라면 국회는 왜 안 되는가. 국회야말로 이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도록 위임한 대표자들의 기관이 아닌가. 그런 국회가 비정규직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국민이 대표로 뽑은 국회의원만으로는 안되고 정규직 조합원들의 위임을 받은 노동계 대표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고집하는 것은 대의제에 대한 인식부족이고 국회에 대한 모독이다.

지금 상황은 응급실에 위급환자가 실려 왔는데,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그 옆 병원의 직원들까지 나서서 합의해야 치료를 해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에게 응급처치의 절박함을 모르는 비정한 국회가 있다면,안락사를 시키든 존엄사를 시키든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 한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ㆍ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