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

"비가 그치자 사이렌이 울렸다,발걸음 멈춰 서는 아무도 없다,신호는 규칙적으로 바뀌고 건너갈 사람은 건너가고,달리는 차들은 그대로 달려간다

이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삼각지 로터리에,반전(反戰)을 위한 기념관이 있다,비가 그쳐도 저승 어느 마을이듯 으스스하게 이어진 회랑들,벽면에 빗방울이 달라붙어 이름자를 읽고 있다

건너 마을 찻집도 오늘 따라 적막하다,실구름 피어오는 의자 하나만 달랑 눈에 든다,에밀레 종신의 비천보살 옷자락이 날 듯이,가느다란 실구름이 피어오르다 없어진다

사이렌이 그치자,의자에서 느릿느릿 일어서는 베레모,빛 바랜 제복의 할아버지였다,소리내며 닫히는 출입문 벽걸이는 아직도 6월5일

단체로 받는 위문편지라도,눈시울 뜨거워진다던 열여섯 살 병사가,구름과자라던 화랑담배는 무슨 색깔로 승천했을까,소총이 키보다 크다던 그는 기념관 한쪽 벽에 이름자라도 남겼을까. "

결혼식에 갔다가,둘러본 전쟁기념관에서 쓰게 된 '구름 피우는 사람'이다. 그때 아들아이는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이었지만,그곳이 경기 북부여서인지,내가 6 · 25를 겪은 세대이고 자식 둔 어머니이기 때문인지,말할 수 없는 아픔에 뼛골이 저려왔다. 벽면에는 전몰 병사들의 이름이 참전국별로 새겨있었고,맨 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국민들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소중한 아들을 보내준 모든 어머니들께 다함 없는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는 뜻의 글이,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새겨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6 · 25! 그 당시 나의 대한민국 코리아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사람의 이름인지 국가의 이름인지,이도 저도 아닌 무엇의 이름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명과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보내준 참전국 어머니들! 그리고는 전쟁 전후 군대 갔다 온 숙부와,다른 친척들로부터 들은 전쟁 참상과 동요처럼 불렀던 군가와,대학 때 위탁생이던 참전군인들의 경험담,전쟁영화에서 본 내용들로 범벅됐다.

초 · 중 · 고등학생 때 써보냈던 위문편지와,마지못해 써야 했던 틀에 박힌 허위의 위문편지에도 보내주었던 답장이 생각났다. 특히 열여섯 살,나와 동갑이라던 한 병사의 답장 등.부끄럽고 미안하게도 나는 이를 시로 쓰고 싶었다. 그리고는 마음먹고 다시 전쟁기념관에 들렀고,그리하여 위의 소품이 태어났다.

사춘기 적의 내 아이들이 신문 방송을 보다 죽음에 대해 묻곤 했다. 나는 질겁하며 죽음에 대해 게거품을 물었던지,다 자란 지금도 내가 펄펄 뛰며 소리소리 질렀다는 죽음을 다시 들려주며,그때 엄마가 자기들에게 얼마나 겁먹었는가를 알았다고 한다. 인류나 나라를 위한 죽음은 고귀한 순교나 순국이지만,실연이나 치욕 등으로 죽으면 이기적 죽음,이도 저도 아닌 죽음은 개죽음보다 못하다고,그래서 살아남아야 갚을 수 있고,또 태어나 누려온 것들에 대한 의무를 다한 다음에 죽어야 한다고,늙어 죽기까지 그 의무를 다하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제대로 죽기 위해서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나.

음양문화권의 우리는 양력이긴 해도 6월6일은 음수(陰數)이자 여성수(女性數)가 겹치는 날이다. 여성의 종국(終局)은 모성(母性)이라,대지라는 어머니 품에 고이 잠들라는 기원에서 현충일로 정했을 듯.

밥도 한번 배부르게 못 먹어봤을 순국선열의 영령들이여! 꽃보다 어린 나이의 그대들 목숨 값으로 내가 오늘까지 살아 살찐다고 투덜거리며 늙어감이 미안하고 죄스럽기 짝이 없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뒷산에서 밤마다 소쩍새가 울어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