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에 가면 '간세다리(느린 걸음걸이를 나타내는 제주 방언)'로 놀멍 쉬멍 걸어보게 마씨!"(올레를 걸을 때 천천히 놀면서 쉬면서 걸어 보시게!)

두 발로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 근심을 걸음걸음마다 내려놓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파란 하늘과 검은 돌담,녹색이 어우러진 '제주 올레길'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5월의 마지막 햇살이 찰랑거리는 제주,잘 정돈된 관광 단지들을 뒤로 하고 '올레길'로 향했다. 몰아치는 일상의 피곤들이 걸음마다 떨어져 나가길 바라며,땅과 내 몸을 가장 가까이 맞붙이고 한발짝 한발짝 쉼표를 찍듯이,그렇게 제주올레가 탄생한 제1코스로 향했다.

◆녹색과 검정,이리도 잘 어울렸던가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서귀포시 시흥군으로 가는 '일주도로' 버스를 탔다. 1시간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시흥리 버스정류장.시흥초등학교 쪽 사잇길에 파란 글씨로 '제주 올레 길'이라 쓰인 푯말이 수줍게 웃고 있다.

검은 돌담을 따라 이어진 시골길을 걷는다. 검붉은 고운 흙이 발길 따라 먼지가 되어 일어나고 이름 모를 들꽃은 바람을 타고 달콤한 향을 뿜어 낸다. 새들의 지저귐은 오감만족 걷기의 일등 공신.

올레길을 걸을 땐 파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나무 기둥,흙길,검은 돌 위에 거칠게 그려진 화살표가 흡사 자연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오름으로 오르기 전 농로에서 만난 돌담 풍경은 넋을 놓을 만하다. 단단한 콘크리트 담도 아닌데 거무스름한 제주의 돌담은 세월과 바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틈으로 삐져 나온 녹색의 풀들이 앙증맞다.

땀이 송글송글 맺히게 할 정도의 다소 가파른 길이 이어졌다. 누가 오름을 완만한 언덕이라고 했을까. 숨 고를 틈도 없이 어느 새 나타난 말미오름 정상.아,제주의 바다와 제주의 마을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숨이 탁 막히며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왼쪽에는 우도봉, 오른쪽으로 성산봉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천하 절경에 감탄하느라 바로 옆에 있는 소떼를 미처 못 보았다. 이 정도 갖고 뭘 놀라느냐고 올레꾼들을 비웃기나 하듯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개인의 방목장을 올레꾼들이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한 덕에 소똥,말똥을 발밑에 두고 걷는 목장 체험을 덤으로 해 본다.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전망에 옹기종기 엎드려 있는 자연 부락,그 경계를 만들어 낸 울퉁불퉁한 검은 돌담길,파란 하늘빛과 그보다 더 푸른 바다,녹색의 나무까지….세상의 모든 색들이 제주에 다 모였다.

◆올레,이제 거꾸로 올래?

말 목장을 가로질러 오름을 따라 내려오자 이름도 예쁜 '종달리'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어귀마다 정성스레 가꾼 꽃과 담장이 정겹다. 경운기 소리와 풀 베는 사람들만 있을 뿐 고요하다. 물을 마시러 들어간 구멍가게에서 아주머니가 계산을 대신 부탁할 정도로 시골 마을의 정이 살아 숨쉰다.

올레의 간판격인 1코스를 완주한 사람들 사이에선 이제 '거꾸로 올레'가 유행이란다. 시흥리 쪽에서 제주 동부의 바다를 보고 걷던 사람들이 종달리 쪽에서 거꾸로 오르는 것.종달리에서 보면 남쪽으로 바다,북쪽으로 오름 봉우리들이 펼쳐진다.

더 재미있는 건 이어져 있는 하나의 오름(두 봉우리)을 두고 시흥리 쪽에서 오르면 '말미오름',종달리 쪽에서 오르면 '알오름'이라고 부른다는 것.

바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던 옛날,물질하던 해녀들끼리 종종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때마다 동네 싸움으로 이어져 지금도 종달리 사람들은 알오름만 일러 주고,시흥리 사람들은 말미오름 가는 길만 알려 준다고.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탁 트인 광치기 해안이 나타났다. 신발을 벗고 바닷물로 뛰어들어가 지친 다리를 시원하게 적셔 본다. 200m는 족히 들어갔는데 아직 무릎밖에 차지 않는다. 이대로 걸으면 저 멀리 보이는 성산봉에도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광치기 해안을 따라 걸으며 석양을 담은 물빛을 바라본다. 올레에 온 그 누구라도 '간세다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글 · 사진(제주)=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올레는…?

'올레'는 제주의 마을 입구에 있는 쉼터(공고레),즉 나무 그늘 밑에서 쉬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이용하던 폭 2~3m,길이 10m 남짓한 좁은 골목길을 말한다. '제주올레'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온 제주 출신 서명숙씨가 비영리 법인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2007년 9월 제주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돼 성산 일출봉 근처의 광치기 해변까지 걷는 첫 코스를 개장한 후 지금까지 서귀포의 해안과 오름,그리고 작은 마을을 끼고 도는 12개 코스(총 215㎞)가 제주시까지 이어져 있다. 이달 27일엔 열세 번째 코스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