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3년차인 장모씨(31)는 투자하고 있는 펀드의 운용보고서를 훑어보다 깜짝 놀랐다. 입사와 동시에 가입한 대형 자산운용사의 '장기주택마련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이외에도 57개 펀드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씨는 "가뜩이나 수익률이 좋지 않아 속상한데 펀드매니저가 수십개 펀드를 운용한다니 제대로 투자할 수 있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펀드시장을 살리려면 투자자금이 더 들어오지 않아 사실상 방치된 상태인 소규모 '자투리펀드'를 통 · 폐합,대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야 투자자들이 자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스타 펀드매니저'가 나오고 장기 수익률이 높은 '명품펀드'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A운용사'하면 'OO펀드'가 바로 떠오를 만큼 인기펀드가 있어야 투자자들의 마음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펀드 수는 세계1위, 펀드당 순자산 36위

우리 현실은 펀드 수만 많을 뿐 자랑스럽 게 내세울 수 있는 펀드는 변변치 않다. 그야말로 외화내빈이다.

4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작년 3분기 말 기준 국내에 설정된 펀드 수는 9896개로 미국(8045개)은 물론 조세회피지역으로 세계적인 헤지펀드들이 몰려 있는 룩셈부르크(9391개)를 웃돈다. 일본(3298개) 영국(2170개) 중국(388개) 등에 비하면 최대 25배 이상이나 많아 이들 선진국을 포함한 주요 44개 국가 가운데 1위다.

펀드는 많지만 '명품펀드'는 찾기 힘들고 사실상 빈사상태인 자투리펀드들만 수두룩하다는 게 문제다.

상황은 올 들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아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설정액 100억원 미만인 소형 펀드는 모두 6328개로 전체 펀드의 66%를 넘는다. 설정 잔액이 10억원도 안되는 펀드도 2381개로 25%나 된다. 반면 1조원이 넘는 펀드는 70개로 0.7%에 불과하다.

당연히 펀드 1개당 투자자금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전체 펀드 수는 세계 1위지만,펀드의 운용 자금 규모를 보여주는 순자산 기준으로는 우리나라가 2461억달러에 그쳐 14위로 뚝 떨어진다. 더욱이 펀드 1개당 평균 순자산은 2487만달러(313억원)로 44개 주요 국가 가운데 36위에 불과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8897만달러)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은 국내 업체들이 시류에 맞춰 펀드를 '일단 만들고 보자'는 식으로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가 급등해 투자자들이 투자할 곳을 찾아 허둥댈 때에 맞춰 수익률보다는 판매를 의식해 급조한 상품을 쏟아낸 결과다.

◆펀드 수십개 굴리는 매니저 많아

자투리펀드가 많아지면 펀드매니저 한 명이 맡는 펀드 수가 늘어 제대로 자금을 운용하지 못해 수익률은 안 나오고 비용만 높아지게 된다. 명품펀드를 만들기는커녕 다른 펀드에까지 피해를 주게 된다는 얘기다.

예컨대 25조원 규모의 주식형펀드를 운용해 미래에셋자산운용 다음으로 주식형펀드 설정액이 많은 모 운용사의 경우 18명의 매니저들이 506개(사모 포함) 펀드를 굴리고 있다. 펀드매니저 한 명당 평균 28개 펀드를 맡고 있는 것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100억원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펀드매니저 입장에서는 제대로 마음먹고 굴리기엔 적은 액수"라고 털어놨다.

그는 "예를 들어 100억원짜리 주식형펀드는 60%를 주식에 넣고 나머지는 채권을 편입해야 하는데 거액이 소요되는 채권을 40억원어치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주식 60억원어치도 삼성전자 같은 대형 우량주의 경우 1만주를 매입하면 끝나버려 운용에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고 난감해했다.

◆펀드 대형화해야 스타 매니저 나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려면 무엇보다 자투리펀드 등 소규모 펀드를 통 · 폐합해 대형화로 가야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펀드는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되 일정 기간 후에도 설정액이 100억원 아래에 그칠 경우 자산운용사가 임의로 해지해 비슷한 유형의 다른 펀드와 합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또 일정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자동 환매되도록 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펀드 약관에 이런 조건을 넣어 사전에 투자자들과 합의한다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다만 기존 펀드의 경우엔 약관 개정이 필요한 만큼 제도 개선이 필요해 현재 외부에 연구 용역을 주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펀드가 대형화돼야 매니저들 간에 경쟁이 벌어져 스타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대표는 "믿고 자금을 맡길 수 있는 스타 펀드매니저가 없다보니 코스닥 테마주에 대한 단타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나오면 여기저기서 펀드를 환매해 직접투자로 뛰어드는 일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주식에 투자해선 안정적으로 차익을 올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투자자들에게 이를 알리려면 확실한 스타 매니저가 등장해 '나보다 낫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산운용 업계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운용사들이 펀드매니저에게 재교육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펀드별로 특색을 살려 시스템을 통해 운용하는 상품과 매니저에 맡기는 상품을 차별화해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