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트'(Net)의 주인공은 컴퓨터 전문가다. 집에서 혼자 일하던 그는 한 장의 디스크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면서 범죄자로 몰린다. 신분을 증명해줄 모든 서류는 변조되고 원래의 그는 사라진다. 옆집에서조차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증언해주지 않는다.

사람과의 소통 없이 컴퓨터에만 매달려 산 결과다. 영화 내용을 들출 것도 없다. 컴퓨터와 은행 전산망이 없던 시절 외부 원고를 게재하자면 기자와 필자는 수 차례 통화 끝에 직접 만나야 했다. 게재 후엔 원고료 전달 을 위해 다시 만났다.

자연히 글씨체는 물론 얼굴과 키,성격,취미까지 알 수 있었다. 작고한 소설가 정비석씨는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글씨는 크고 시원시원했으며,천승세씨는 콧수염을 기른 터프한 외모와 달리 글씨는 더없이 깔끔했고,김이연씨는 운전과 운동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그것이다.

요즘엔 모든 원고를 이메일로 주고 받으니 도통 만날 일이 없다. 그러니 서로 상대방의 인상이나 분위기 성격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알지만 모르는 사이인 셈이다. 게다가 이렇게 컴퓨터로만 소통하는 일이 잦다 보니 정작 사람을 만나도 서먹서먹하고 데면데면해지기 일쑤다.

미국도 사정이 비슷한 걸까.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엔진 구글의 최고경영자(CEO) 에릭 슈미트(54)가 펜실베이니아 대학 졸업식 축사를 통해 "컴퓨터를 꺼 보라"고 했다는 소식이다. 컴퓨터를 끄고 주위를 둘러봄으로써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찾아 참다운 인간관계를 만들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으면 도리없이 뭔가를 읽거나 움직이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칼럼이 잘 쓰여지지 않을 때,논리도 안서고 적절한 문구 또한 생각나지 않을 때도 무작정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보다 일어나 회사 옆 약현성당 기도동산을 산책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복잡했던 머리 속이 정리되고 마음도 안정되면서 무슨 말로 시작해서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할지 떠오른다. TV처럼 컴퓨터도 아주 끌 순 없다. 그러나 가끔은 꺼보는 것도 괜찮다 싶다. 하버드대 출신의 성공 여부도 인간관계에 달렸다고 하거니와 누가 뭐래도 꽃보다 사람이요,컴퓨터보다 사람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