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3. 최시한「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 교육,지배와 저항의 담론

사회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따르면 국가의 통치수단은 크게 억압적인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경찰이나 군대,관공서와 같이 국가가 직접 그 권력을 실제적으로 행사하는 기구를 가리키며,후자는 종교,가족,법,정치,조합,언론처럼 사회구성원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밀히 주입하여 통치를 수월하게 하는 장치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란 사회의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커다란 주체(S),곧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회 속에 존재하는 작은 주체,곧 개인들(s)을 호명(interpellation)하여 그들을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포섭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주목할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기구의 범주 안에 '교육'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교육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안정을 위해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는데 그 첫째는 교육이 생산수단의 변형과 노동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이고,둘째는 교육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내용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기능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존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데에 큰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로서의 교육은 체제순응적인 개인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시민의 탄생을 처음부터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일 수 있다.

한편 알튀세르와 달리 교육의 이데올로기적인 속성을 체제 비판이나 저항의 담론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있다.

헨리 지루와 같은 교육학자는 교사는 비판적인 지식인이며 그가 행하는 교육 행위는 비판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었고 의식화 교육을 주장했던 파울로 프레이리도 교육이 진정한 인간 해방을 가져온다고 역설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오랜 세월 교육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

아마도 그것은 교육이 그 어떤 제도보다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역할과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에 대한 헤게모니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도 있고,역으로 저항과 비판의 담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헤게모니에 대한 정치 세력의 갈등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최시한의 소설 「허생전을 읽는 시간」은 교육에 대한 헤게모니적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진정으로 교육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해보자.

⊙ 허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의 주요인물은 작품의 서술자인 '나'와 말더듬이 '윤수',그리고 우등생인 '동철'과 국어를 가르치는 '왜냐 선생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작품의 주요 내용은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어 시간에 '허생전'을 배우는 이야기이다.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별명이 붙은 '왜냐 선생님'은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학생들에게 줄거리를 각자 잡아오라는 과제를 낸다.

하지만 선생님은 교장 선생과 갈등하다 몇 차례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쉽게 짐작하듯 작품은 80년대 말 전교조가 합법화되기 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 불법단체였던 전교조에 가입한 '왜냐 선생님'이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왜냐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만큼은 학생들에게 특유의 '왜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학생 스스로 허생전을 분석해 나가도록 지도한다.

작품을 자발적으로 감상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왜냐 선생님의 수업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문예반 활동을 하며 평소 학교교육에 불만이 많았던 서술자 '나'와 말더듬이 '윤수'는 선생님을 지지하지만 우등생 동철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은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참고서나 대학입시와 다르다며 투덜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허생을 평가하는 데에 이르러 첨예하게 대립한다.

"허생은 장사해서 돈을 벌고 그걸로 가난한 백성들을 돕지만,항상 선비로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선비의 자리,양반사대부라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그 말입니다. 허생은 장사를 하지만 장사꾼을 경멸하고,백성을 돕고 북벌책 같은 국가대사를 논하지만 조정에 뛰어 들어 적극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중략) 갑자기 동철이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허생이 졌다는 건,누구한테 졌다는 말씀입니까? 책에는 허생이 그냥 어딘가로 가 버렸다고 되어 있잖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투쟁을 강조하시는데,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동철이의 말투에 화가 났고,걔가 말하고픈 내용이 짐작되어 가슴이 졸아들었다.

선생님은 동철이가 서 있는 걸 그대로 둔 채 천천히 말씀하셨다.

"허생이 졌다는 말은,허생의 행동전체를 놓고 독자인 우리가 평가하느라고 쓴 말입니다. 허생은 확고한 이상과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걸 다 실현하지 못했고,그러니 불만스런 현실과 그 현실을 지배하는 사람들한테 졌다고 본 겁니다. (중략)"

그런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상스레 딱딱해져 갔다.

동철이 때문에 화가 나 그러시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힐끔 보신 복도 쪽 거기,어떤 사람 둘이 서 있었다.

-최시한,「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위의 인용처럼 왜냐 선생님은 '허생'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과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 선생님은 허생이 현실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힘주어 지적하며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지식인은 현실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가 모든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반응만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우등생 동철은 허생이 현실의 논리에 패배한 것이라는 왜냐 선생님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허생이 국가를 안정시키는 일을 했으므로 영웅에 다름 아니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결과적으로 왜냐 선생님은 허생전을 통해 자신이 지닌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태도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동철은 이에 따르지 않고 허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작품을 비판과 저항의 태도로 감상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물론 동철의 견해는 앞뒤 맥락으로 볼 때 대학입시와 관련된 교과지식이나 참고서에서 보았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시 말해 동철의 감상법은 체제 순응적인 태도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왜냐 선생님과 동철의 차이는 교육을 기존 체제의 지식과 질서를 습득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아니면 체제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차이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두 사람의 대화와 토론은 불행하게도 '복도에 있던 두 사람'에 의해 중단된다는 사실이다.

전교조에 가입하고 비판과 저항의 태도를 지닌 '왜냐 선생님'은 강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학교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

과거 군사 독재 시절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호명이 존재했었다.

온 국민이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띨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교육은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 국가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80년대 후반 민주화 열기와 더불어 등장한 전교조는 교육을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로부터 자율적으로 독립시키려는 데에 가장 큰 명분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교육을 통한 비판과 저항의 메시지는 나름대로 그 의미와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물론 국가수준의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이제 교육은 체제 순응이나 비판과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 같다.

체제 순응이든 저항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경직된 이데올로기는 교육받는 이들에게 외면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외되어왔던 개인의 현실적인 삶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