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가장 놀란 일 중 하나는 백악관을 비롯한 각계의 여성들 숫자였다. " YS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박진 의원이 전한 얘기다.

여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손 여사도 말씀 좀 하시라"는 기자들에게 "솥뚜껑 운전사가 뭘 알겠느냐"고 하던 대통령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겠다 싶었다.

그래도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귀국 후 여성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대폭 증대됐다고 했다. 16년 전에 여성 천국처럼 보였던 미국이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올브라이트,라이스에 이어 힐러리 클린턴까지 3대째 여성이 국무장관을 맡고,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5.7%,신규 임원은 38%에 달한다는 마당이다.

그런 미국에서도 여성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HP) 회장의 고백은 리얼하다. '무대에선 스트립 댄서들이 라이브쇼를 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고객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려면 무대 앞을 가로질러야 했다. 서류가방을 꽉 쥐고 걸어갔다. …내가 꼭 바보 같았다. '

대책 없이 겪어야 하는 문제는 초년병 시절로 끝나지 않는다. 피오리나 역시 업무 성과로 평가받으려 한 노력과 달리 성별과 외모 및 성격에 대한 기사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하면 출장 때 헤어디자이너를 데리고 다닌다는 식의 루머 때문에 고통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러니 한국 여성은 오죽하랴.다행히 능력을 인정받거나 고시에 합격한 알파걸들의 예를 들어 한국도 이제 여자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고위직은 물론 남성 위주 조직에서 승진한 여성 간부들만 해도 "섬에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외롭고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 때문에 상사나 부하직원을 조용히 만나 의논하고 싶어도 자칫 남자와 단둘이 만난다는 소문이 날까 부담스러워 피하다 보면 정보 채널에서 소외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토로다. 남자들끼리 모여 있다 자신을 보고 흩어질 때의 느낌은 뭐라 형언하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이외에도 남녀에 대한 이중적 잣대 때문에 고달픈 여성들을 더 힘들게 하는 대목이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성 팀장(부장)은 남자에 비해 이중 삼중으로 힘든 수가 많다. 여자 팀장이란 이유로 남달리 주목받는 만큼 업적에 대한 부담이 큰 데다 여자 상사를 껄끄러워하는 남자 직원을 다스리는 일 못지않게 여자직원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도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 상사의 경우 남자를 더 야단쳐도 '남자가 남자를 더 괴롭힌다'는 식의 말이 나지 않지만 여자 상사가 여자를 조금이라도 더 야단치면 '여자가 여자를 더 괴롭힌다'는 식의 뒷말이 퍼지기 일쑤다.

왜 이런가. 미국의 '직장 괴롭힘 연구소(WBI)'의 조사 결과 및 분석은 그 원인의 일단을 드러낸다. 발표에 따르면 직장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의 60%는 남성이었다. 단 남녀 구분 없이 못살게 구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대상의 70%가 여성이었는데 이유는 '상대가 똑같이 공격할 가능성이 작다'는 것과 여성의 직장 내 성공이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성의 기회가 적은 게 원인이라는 얘기다. 미국에서도 이 지경이니 우리 사회의 여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클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성용 자리를 구색처럼 만들어놓고 선심쓰듯 나눠주다 보니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같은 여성에게 관대해지기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미신이다. 잘못된 공식을 확대 재생산하기보다 여성에 대한 문호를 넓힘으로써 남녀가 함께 호흡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만이 사회 발전 및 국가 경쟁력 제고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