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은 대략 1억5000만년 동안 식물의 수정을 돕는 배달부 역할을 해왔다. 수술에 있는 꽃가루를 암술머리로 옮겨 열매를 맺도록 해 준다. 이렇게 벌의 도움을 받는 식물은 전체의 25%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의 대부분이 거기에 속해 있다. 세계환경단체인 '어스워치'가 대체 불가능한 생물 5종 가운데 가장 먼저 벌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처럼 중요한 일을 하는 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꿀을 찾아 무더기로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단다. 일종의 '집단 가출'이라고 할까. 현재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는 곳은 일본 나가노 현이다. 이 지역 벌 230여만 마리가 갑자기 사라져 딸기 수박 사과 멜론 배 가지 호박 등 과일 · 야채 농가가 큰 타격을 입고 있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전했다. 돗토리 아오모리 등 다른 7개현을 포함하면 1000여만 마리의 벌이 부족한 것으로 일본 농림수산성은 추산하고 있다.

벌이 없으면 사람 손으로 일일이 수분작업을 해야 한다. 수확량이 줄어드는 반면 생산비는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꽃가루를 균등하게 옮기지 못해 모양 좋은 과일이 열리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꿀벌통을 도둑질하는 일이 빈발하고 일본 정부는 아르헨티나 등에서 벌을 수입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문제는 벌들의 가출이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데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2006년 가을 처음 신고된 이후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미국 24개 주에서 25%의 벌이 사라졌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북 문경과 칠곡 양봉 농가의 꿀벌이 떼죽음한 일이 생겼다.

벌들이 사라지는 까닭은 분명치 않다.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 많아 한두가지를 꼭 집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살충제 도시화 지구온난화 벌응애 곰팡이 바이러스 항생제 영양실조….자기장을 감지해 길을 찾는 벌들이 휴대폰 인터넷 등 난무하는 전자파 탓에 방향감각을 잃는다는 추측도 있다. 생물학자들 사이에선 "아직도 벌들이 살아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라는 말도 나온다.

자연이 베푸는 '생태계 서비스'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우리는 그 서비스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일단 교란되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원인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고 복원하기는 더욱 어렵다. 벌들이 사라지는 현상을 간단히 봐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