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3' 국가들이 역내 자금지원체계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다자화 기금의 분담액을 확정했다. 한국은 공동기금 1200억달러 가운데 16%(192억달러),중국과 일본은 각각 32%,나머지 20%는 아세안 국가들이 분담키로 했다.

이른 시일 내에 역내 경제감시기구를 설립하고 역내 발행 채권에 신용보증을 제공하는 채권보증투자기구(CGIM)를 우선 5억달러 규모로 출범시킨다는 데도 합의했다. 경제감시기구는 지역 내에서 사실상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을 하면서 아시아통화기금(AMF)으로 발전해갈 것으로 예상된다. 툭하면 외환위기에 빠졌던 아시아국가들이 금융시장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특히 이번 합의는 그동안의 숱한 좌절을 딛고 일궈낸 구체적 성과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90년대 말 아시아지역을 휩쓴 외환위기 직후 일본이 AMF 구상을 내놓았지만 미국과 IMF의 반발,중국의 소극적 태도 등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다. 이에 앞서 1975년 발족한 ACU(아시아결제동맹)는 달러화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제결제를 할 수 있고,아시아 단일통화를 지향한 구상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국은 가입국이 일부 서남아시아 국가로 국한된 소규모 기구에 머물고 말았다.

경제공동체 구상 또한 시련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수상은 1990년 말 당시의 EC(유럽공동체)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항할 경제블록을 만들기 위해 EAEG(동아시아 경제그룹)구상을 제시했지만 대상에 끼지 못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 같은 배경도 있는 만큼 이번 합의에 대한 기대는 크다. 물론 기금이 조성된다고 해도 역내 국가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자금은 전체의 20%(240억달러)에 불과하다. IMF의 역할 축소를 우려한 미국이 IMF와 협의할 것을 조건으로 이 구상을 받아들인 탓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미국과 IMF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이 높아지면서 하나의 경제권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제금융시장 변화에 공동 대응하고 교류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공동시장 구성,나아가 단일통화를 만드는 문제로까지 협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선 우선 역내 여유자금이 최대한 역내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3조달러를 훨씬 웃도는 보유외환을 미국 국채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이 지역 국가들이 역내 투자에 관심을 돌린다면 북미 · EU에 맞서는 거대 시장으로 발전해나갈 게 틀림없다.

물론 벌써부터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유로화가 공용통화로 통용되기까지는 1957년 EEC(유럽경제공동체) 발족 이후 무려 45년의 기간이 걸렸다. 그만큼 주도면밀한 준비와 어려운 교섭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경제발전 단계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유럽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만큼 서두르지 말고 한 단계 한 단계 진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강조해 둘 것은 우리의 유리한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이 확보한 CMI다자화 공동기금 지분은 중국과 일본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인구 GDP(국내총생산) 외환보유고 무역규모 등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하면 성공적 결과다.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의식을 감안할 때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앞으로 역내 경제협력 강화 방안을 놓고도 양국이 치열하게 견제할 게 분명한 만큼 이견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실익을 챙길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장기적이고도 치밀한 전략을 미리미리 강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