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현 정부가 허울뿐인 '자율'을 앞세워 '관제(官製) 자율'과 '방임(放任)행정'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한국경제신문 2008년 5월16일자 시론).작년엔 단위학교 의사(擬似)자율이 문제였지만,이번엔 대학 입학사정관제 도입이 '관제 자율'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지난 3월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내년 신입생부터 입학사정관제도를 획기적으로 확대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이 단초가 돼 교육과학기술부가 이 제도를 채택한 대학에 지난해 157억원보다 많은 236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에 각 대학이 예산을 따기 위해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이 제도를 무분별하게 확대 · 추진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실상은 전국에 입학사정관이 200여명 정도이고 그나마 이 중 89%가 비정규직에 재직(경력)기간도 짧고,또 앞으로 늘어나는 사정관의 전문성 함양도 문제이다.

입학사정관제는 원래 신입생 선발을 전담하는 전문가가 지원자들의 그간 쌓아온 학력과 향후 학습수행 능력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 · 측정해 우수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다. 지원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이 제도는 다양한 전형 기준을 가지고 전문가가 사정(査正)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인정해 주는 대학을 선택하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이 제도 성패의 첫 번째 관건은 전문사정관 확보에 달려 있다.

하지만 전문 사정관 확보도 제대로 안 되고 다양한 전형 기준에 따른 운영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은 대학 형편에 견주어 이 제도는 지원자와 이들을 지도하는 각 고교에 일종의 공황상태를 안겨 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더욱이 이 제도를 채택한 대학에 차등 지원을 하겠다는 당국의 졸속 지원에 매달리는 좀비(zombi) 대학의 기생심리만 조장해 대학 자율은 오히려 저해될 뿐이다. 이 제도가 성공하려면,적어도 다음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사정관제 도입 여부는 대학의 독자적 판단에 전적으로 맡겨 대학마다 서로 다른 전형 요소를 가지고 신입생을 선발하게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교육당국은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의 보조금 지급 수단을 강구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국가 보조금은 입시를 통한 대학 제재 수단으로 활용하지 말고 학술연구 및 교육여건 개선이라는 원래 목적에 사용돼야 한다.

둘째,해당 대학은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신뢰를 구축해 자력으로 권위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독자적인 교육이념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해당 대학은 자신만의 독특한 전형 요건을 객관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려 할 것이고,이 과정에서 입학사정관이 '권위'를 가지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셋째,다양한 전형기준과 방식에 의한 선발을 골자로 하는 이 제도가 성공하려면,이 제도를 통해 전형을 볼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시스템이 다양화돼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 선택권과 다양한 교육운영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평준화부터 폐지해야 한다. 다양한 전형을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 사정관이 획일적인 교육체제에서는 수행할 역할도 또 존재 이유도 없다.

1965년도 경기중학교 입시에서 객관식 정답이 2개로 판명된 '무우즙 사건'은 법정소송으로 불거진 대형 사건이다. 지금처럼 전문 인력도 부족하고,주관적인 요소와 판단이 많이 개입하는 입학사정관에 대한 객관적 신뢰와 대학 본연의 자율과 권위도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제도를 시행한 대학들에 '무우즙 사건'같은 법정소송이 이어지면 어떻게 수습하려는가. 교육의 자율,권위,신뢰는 결코 관(官)주도로 이뤄지지 않는다.